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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 상아탑(象牙塔) 황석우

봄 가을 가고 결박 풀려 봄이 오다. 나무 나무에 바람은 연한 피리 불다. 실강지에 날 감고 밤 감아 꽃밭에 매어 한 바람 한 바람씩 당기다. 가을 가고 결박 풀어져 봄이 오다. 너와 나 단 두 사이에 맘의 그늘에 현음(絃音) 감는 소리. 타는 소리 새야, 봉우리야 세우(細雨)야, 달아 - - 황석우 는 “봄을 맞이하는 즐거움이 주된 내용을 이루는 이 시는 계절의 흐름을 '실'로 구상화하여 표현한 시적 발상이 기발하다. 시인은 겨울의 이미지를 결박으로 표상하고, 결박이 풀리는 자유로운 비상의 이미지로 봄을 노래한다. 특히 '실강지에 날 감고 밤 감아'라는 표현은 세월을 당겨서라도 봄을 빨리 맞고 싶은 시인의 조급한 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실강지(실타래)에 감겨 팽팽하게 당겨지는 줄의 탄력은 현악기가 ..

글 모 음 2023.03.02

거울 - 이상(李箱) 김해경

거울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 못 하는구료마는 거울이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 나는 지금 거울을 안 가졌소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소. 잘은 모르지만 외로된 사업에 골몰할게요. 거울 속의 나는 참나와는 반대요마는 또 꽤 닮았소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1934.10. - 이상 김해경 *** 李霜(이상)은 띄어쓰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데, “이것은 정서법이나 기존의 율격의식 같은 ..

글 모 음 2023.03.01

봄비 - 변영로(卞榮魯) 민족 시인

봄비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지노니!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1922.3. - 변영로 아--- 잃은 것 없이 서운..

글 모 음 2023.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