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모 음 53

너와 나의 애가 - 은종(銀鍾) 박화목

너와 나의 애가 어제는 너의 초록빛 울음으로 하여 산딸기가 빨갛게 절로 익었는데 오늘은 하얀 달이 파랗게 질려 하현(下弦)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이제 머지않아 우리들 운명이 쇠잔하여 죄 없는 자랑이던 그 투명한 두 날개가 탈락하고 말 것이다. 욕설과 변명과 부조리의 잡초 속에서 아, 무엇을 더 바라리요. 바라리요 ? 다만 종말의 날에 정결한 찬 이슬이라도 흠뻑 마셨으면..... - 박화목 朴和穆

글 모 음 2023.03.21

새 - 천상병과 동 베를린 사건

새 외롭게 살다가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이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 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천상병 千祥炳 (1959년) *** 천상병과 ‘동백림 사건’ 에 적혀 있는 글만 조금씩 따왔다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 김형욱 부장 시절의 공안 사건 중정은 서유럽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과 유학생 가운데 194명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에 들어가 간첩 활동을 했다고 발표. 음악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

글 모 음 2023.03.20

저 구름 흘러가는 곳 - 김용호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아득한 먼 그곳 그리움도 흘러가라 파아란 싹이 트고 꽃들은 곱게 피어 날 오라 부르네 행복이 깃든 그 곳에 그리움도 흘러가라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이 가슴 깊이 불타는 영원한 나의 사랑 전할 곳 길은 멀어도 즐거움이 넘치는 나라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내 마음도 따라가라 그대를 만날 때까지 내 사랑도 흘러가라 저 구름 흘러가는 곳 가없는 하늘 위에 별빛도 흘러가라 황홀한 날이 와서 찬란한 보금자리 날 오라 부르네 쌓인 정 이룰 그곳에 별빛도 흘러가라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이 가슴 깊이 불타는 영원한 나의 사랑 전할 곳 길은 멀어도 즐거움이 넘치는 나라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내 마음도 따라가라 그대를 만날 때까지 내 사..

글 모 음 2023.03.19

향미사 - 파하(巴河) 이원섭

향미사 (響尾蛇)* 향미사야. 너는 방울을 흔들어라. 원을 그어 내 바퀴 삥삥 돌면서 요령처럼 너는 방울을 흔들어라. 나는 추겠다. 나의 춤을! 사실 나는 화랑의 후예란다. 장미 가시 대신 넥타이라도 풀어서 손에 늘이고 내가 추는 나의 춤을 나는 보리라. 달밤이다. 끝없는 은모랫벌이다. 풀 한 포기 살지 않은 이 사하라에서 누구를 우리는 기다릴거냐. 향미사야. 너는 어서 방울을 흔들어라. 달밤이다. 끝없는 은모랫벌이다. - 이원섭 李元燮 * 향미사(響尾蛇) ~ 방울뱀 향미(響尾)- 꼬리를 울려 소리가 나게 한다.’라는 뜻

글 모 음 2023.03.18

방랑기 - 이설주 (李雪舟)

방랑기 숭가리* 황토 물에 얼음이 풀리우면 반도 남쪽 고깃배 실은 낙동강이 정이 들고 산마을에 황혼이 밀려드는 저녁 밤이면 호롱불 가물거리는 뚫어진 봉창이 서러웠다. 소소리바람* 불어 눈 날리는 거리를 길 잃은 손이 되어 몇 마디 줏어 모은 서투른 말에 꾸냥*이 웃고 가고 행상에 드나드는 바쁜 나루에 물새가 울면 외짝 마음은 노상 고향 하늘에 구름을 좇곤 했다. - 이설주 李雪舟 * 숭가리 ~ 송화강(松花江) 는 "백두산 천지 비룡폭포에서 시작해 길림성, 흑룡강성 지역을 흐르는 강."이라며 "중국어로는 ''松花江(쑹화장)', 만주어로는 숭가리 울라(:ᠰᡠᠩᡤᠠᡵᡳ ᡠᠯᠠ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숭가리'는 은하수를 뜻한다."라고 적었다. * 소소리바람 명사) 이른 봄에 살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차고 매..

글 모 음 2023.03.17

국제 열차는 타자기처럼 - 김경린

국제 열차는 타자기처럼 오늘도 성난 타자기처럼 질주하는 국제열차에 나의 젊음은 실려가고 보라빛 애정을 날리며 경사진 가로에서 또다시 태양에 젖어 돌아오는 벗들을 본다. 옛날 나의 조상들이 뿌리고 간 설화(說話)가 아직도 남은 거리와 거리에 불안과 예절과 그리고 공포만이 거품일어 꽃과 태양을 등지고 가는 나에게 어둠은 빗발처럼 내려온다. 또디시 먼 앞날에 추락하는 애증이 나의 가슴을 찌르면 거울처럼 그리운 사람아 흐르는 기류를 안고 투명한 아침을 가져오리. - 김경린 金璟麟 는 그를 가르켜 '20세기와 21세기의 모더니즘을 아우른 시인'으로 요약했다.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146

글 모 음 2023.03.16

향수(鄕愁) - 우사(雨社) 김광균

鄕愁(향수) 저물어 오는 육교 위에 한 줄기 황망한 기적을 뿌리고 초록색 램프를 달은 화물차가 지나간다. 어두운 밀물 위에 갈매기 떼 우짖는 바다 가까이 정거장도 주막집도 헐어진 나무다리도 온 ―겨울 눈 속에 파묻혀 잠드는 고향. 산도 마을도 포푸라나무도 고개 숙인 채 호젓한 낮과 밤을 맞이하고 그 곳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조그만 생활의 촛불을 에워싸고 해마다 가난해 가는 고향 사람들. 낡은 비오롱*처럼 바람이 부는 날은 서러운 고향. 고향 사람들의 한 줌 희망도 진달래빛 노을과 함께 한번 가고는 다시 못 오지. 저무는 도시의 옥상에 기대어 서서 내 생각하고 눈물지움도 한 떨기 들국화처럼 차고 서글프다. - 김광균 金光均 * 비오롱 = 바이올린 ビオロン ([(프랑스어) violon]) 명사 비올롱. (=..

글 모 음 2023.03.15

강강술래 - 심호(心湖) 이동주

강강술래 여울에 몰린 은어(銀魚) 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래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白薔微) 밭에 공작(孔雀)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이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에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旗幅)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 이동주 * 뇌누리~ ‘물살, 소용돌이, 또는 여울의 옛말’이라고 네이버블로그 여러 곳에서 풀었다.

글 모 음 2023.03.14

고향으로 돌아가자 - 가람(嘉藍) 이병기

고향으로 돌아가자 ​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암데나 정들면 못 살리 없으련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가. ​ 방과 곳간들이 모두 잿더미 되고, 장독대마다 질그릇 조각만 남았으나, 게다가 움이라도 묻고 다시 살아 봅시다 ​ 삼베 무명옷 입고 손마다 괭이 잡고, 묵은 그 밭을 파고 파고 일구고, 그 흙을 새로 걸구어 심고 걷고 합시다. - 이병기 --- 고향으로 돌아가자 (가사자막) 작곡가 김국진 바리톤 김우주 피아노 김성희 --- 동영상 https://youtu.be/OFUdvpDjXps

글 모 음 2023.03.13

별의 아픔 - 남궁 벽 천재 시인

별의 아픔 임이시여, 나의 임이시여, 당신은 어린 아이가 뒹굴을 때에 감응적으로 깜짝 놀라신 일이 없으십니까. 임이시여, 나의 임이시여, 당신은 세상 사람들이 지상의 꽃을 비틀어 꺾을 때에 천상의 별이 아파한다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 남궁벽 나민애 문학평론가는 지에, 남궁 벽의 천재성을 大擧(대거) 극찬하고 있다. 이 시는 우리가 잃어버린 한 천재의 작품이다. 남궁벽은 남궁 성씨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인이다. 시인이 참 드물고 적었던 1920년대를 누구보다 반짝거리며 맞이했던 문인이다. 1920년에 ‘폐허’라는 이름의 잡지가 세상에 나왔는데 남궁벽은 창간 멤버였다. 멤버들 중에서도 남궁벽은 남달랐다. 폐허는 잡지 제호처럼 조금 퇴폐적이고 허무한 작품이 실리곤 했다. 하지만 남궁벽의 작품은 보다시피 낭만..

글 모 음 2023.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