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모 음 53

떠나가는 배 - 박용철(朴龍喆)

떠나가는 배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미련이나 있을 거냐 ​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간다 - 박용철 *묏부리 ‘멧부리’의 방언(평북, 함남). = 산등성이나 산봉우리의 가장 높은 꼭대기. ** '멧부리'와 '멧봉우리' 중 올바른 표현은? 산등성이나 산봉우리의 가장 높은 꼭대기를 일컬어, ‘멧부리’라 한다. ‘산꼭대기’와 같은 말이다. ‘산봉..

글 모 음 2023.03.10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지조 시인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은 “김영랑의 시 세계는 세 단계로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 드러난 시와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의 의식이 나타나있는 시, 일제치하 새나라 건설의 의욕으로 충만된 시가 있다.”라고 요약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영랑 [金永郞] (한국현대..

글 모 음 2023.03.08

세월이 가면 - 박인환과 그 사연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인환 는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 시인의 마지막 시로 알려져 있는데 작품 일화가 있다. 당시 문인들의 아지트였던 명동의 대포집 '은성'에서 극작가인 이진섭, 백치 아다다를 불러 유명한 나애심이 같이 술을 마시던 가운데, 시를 쓰던 박인환의 종이를 들고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이고 나애심이 바로 불렀다. 나애심이 먼저 술자리에서 나가자, 나중에 온 테너 임만..

글 모 음 2023.03.07

소연가 - 화인(花人) 김수돈

소연가 (召燕歌) 꽃 향(香)이 밤그늘의 품에 안겨 끝이 없는 넓은 지역을 돌고 돌며 펼쳐와 슬픔이 남아 있는 먼 추억을 건드리면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만다. 새 주둥이 같은 입술이 빨간 열매를 쫓으려던 유혹에 너도 여인이므로 타박타박 고개 숙인 채 걸어간 것을 지금은 다시 돌아오렴 열린 창 앞을 쫓는 제비같이 너도 나를 찾아오렴. - 김수돈 金洙敦 는 “김수돈은 꽃과 술과 여인을 절절히 사랑한 낭만적 시인이다. 일제 말기와 해방기, 전쟁기로 이어지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길에서 그의 삶을 이끌어 간 것은 순정한 시와 깊은 우수와 방만한 취기와 열정적인 사랑이었다. 이러한 삶의 우수와 낭만성은 그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후기 작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꽃과 여인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글 모 음 2023.03.06

체념 - 월하(月下) 김달진

체념 봄안개 자욱히 나린 밤거리 가등(街燈)은 서러워 서러워 깊은 설움을 눈물처럼 머금었다 마음을 앓는 너의 아스라한 눈동자는 빛나는 웃음보다 아름다워라 몰려가고 오는 사람 구름처럼 흐르고 청춘도 노래도 바람처럼 흐르고 오로지 먼 하늘가로 귀 기울이는 응시 혼자 정열의 등불을 달굴 뿐 내 너 그림자 앞에 서노니 먼 사람아 우리는 진정 비수(悲愁)에 사는 운명 다채로운 행복을 삼가하오 견디기보다 큰 괴로움이면 멀리 깊은 산 구름 속에 들어가 몰래 피었다 떨어진 꽃잎을 주워 싸늘한 입술을 맞추어 보자. - 김달진 (1946. 6) *작가 나이 40에 애틋한 짝사랑을 할리는 없었으리라! 해방이 됐어도, 바라던 삶이 온전하게 반영되지 않자, 자신의 마음을 시로 노래해 숨은 한을 풀고자 한 것 아니겠나! 첫 문단..

글 모 음 2023.03.05

내 마음 - 초허(超虛) 김동명

내 마음(은)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 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 김동명 김동명(金東鳴)의 시에 김동진(金東振)이 곡을 붙인 가곡. --- 내 마음 - 소프라노 강혜정 --- 동영상 https://youtu.be/_zDXu2hvVKw 은 “1938년 발표된 김동명(金東鳴)의 시. 제2시집 ≪파초(..

글 모 음 2023.03.04

개여울 - 김 소월(素月)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 김소월 --- 개여울 🌺조명섭 [가요힛트쏭] KBS방송 --- 동영상 https://youtu.be/2AYHCwobj4g --- [풀버전] 아름답고 슬픈 노래.... 정재일(Jung jae il)x아이유(IU) ′개여울′♪ 너의 노래는(Your Song) 2회 --- 동영상 https://youtu.be/kj71jzO5U8k + 개여울 : 작곡가 이희목이 곡을 붙여 가수 김정희가 1967년 처음 불렀고, 이후 1972..

글 모 음 2023.03.03

봄 - 상아탑(象牙塔) 황석우

봄 가을 가고 결박 풀려 봄이 오다. 나무 나무에 바람은 연한 피리 불다. 실강지에 날 감고 밤 감아 꽃밭에 매어 한 바람 한 바람씩 당기다. 가을 가고 결박 풀어져 봄이 오다. 너와 나 단 두 사이에 맘의 그늘에 현음(絃音) 감는 소리. 타는 소리 새야, 봉우리야 세우(細雨)야, 달아 - - 황석우 는 “봄을 맞이하는 즐거움이 주된 내용을 이루는 이 시는 계절의 흐름을 '실'로 구상화하여 표현한 시적 발상이 기발하다. 시인은 겨울의 이미지를 결박으로 표상하고, 결박이 풀리는 자유로운 비상의 이미지로 봄을 노래한다. 특히 '실강지에 날 감고 밤 감아'라는 표현은 세월을 당겨서라도 봄을 빨리 맞고 싶은 시인의 조급한 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실강지(실타래)에 감겨 팽팽하게 당겨지는 줄의 탄력은 현악기가 ..

글 모 음 2023.03.02

거울 - 이상(李箱) 김해경

거울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 못 하는구료마는 거울이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 나는 지금 거울을 안 가졌소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소. 잘은 모르지만 외로된 사업에 골몰할게요. 거울 속의 나는 참나와는 반대요마는 또 꽤 닮았소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1934.10. - 이상 김해경 *** 李霜(이상)은 띄어쓰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데, “이것은 정서법이나 기존의 율격의식 같은 ..

글 모 음 2023.03.01

봄비 - 변영로(卞榮魯) 민족 시인

봄비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回想)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지노니!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1922.3. - 변영로 아--- 잃은 것 없이 서운..

글 모 음 2023.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