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정치인으로서 제1야당 대표에 추대된 것은 그만큼 그를 믿는 구석도 있다는 것 아닐까? 추미애(秋美愛;1958~ )는 1995년 8월 27일부터 꼬박 21년 간 정치를 하면서 믿기지 않을 정도의 실수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를 지지한 투표율(54.03%p)을 보면 나머지 두 후보 - 김상곤 후보(22%)와 이종걸 후보(24%) - 의 지지율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으니 그동안 그의 실수를 용서한 것 같다. 참으로 다행한 일 아닌가?
과거 2004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에 찬성표를 던졌을 때 그의 사고(思考)는 어디에 있었을까? 의미심장하지는 않게 짚어본다면, 2003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송금에 대한 특검이 실시되면서 그는 노무현 정부와 거리를 갖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누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김대중은 추미애라는 인물을 정치로 끌어들인 정치 아버지 아닌가? 그 아버지 과거 일에, 그 아버지를 등에 업고 대권을 쥔 이가 권력을 이용해서 아버지 밑의 거물들에 대해 특별검사 수사를 한 것에 지나친 오기(傲氣)를 품은 것이 아닌가? 불법을 바로 잡겠다는 것에 항거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탄핵까지 했으니 당연히 오판의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결국 탄핵안 가결 후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그리고 그는 속죄 의미로 '삼보일배'를 했지만, 그해 17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참패하면서 그도 낙선하고 만다. 이로 인해 노 전 대통령 지지층과 씻기 어려운 앙금이 생긴 것이다. 그 악재는 이번 경선에서도 그를 아프게 했다. 그러나 당 대표가 됐다. 문재인과 그 세력이 뒷받침 해준 덕이 맞는가?
1996년 15대 총선의 서울 광진을 지역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17대만 낙선을 하고, 자그마치 5선에 성공한 정치 베테랑이다. 그러나 그는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으로 재직하던 2009년 노동법 개정안 '날치기 통과' 논란에 휘말려 당원권 정지 2개월 처분도 받았다. 추미애는 한나라당 의원들과 단독으로 '노동조합 및 노조관계 조정법 개정안'(추미애 안)을 통과시켜, 노무현 탄핵이후 또다시 논란을 일으켰다.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과 복수노조를 시행해나가고 교섭창구를 단일화 하되 사용자가 동의하는 경우, 산별노조의 교섭권을 보장하는 내용이 든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 문제로 떠올랐다.
1997년 김대중 대선 당시 추미애는 민주당 깃발을 들고 대구로 향했다. 당시 대구 인심은 민주당이 들어갈 틈도 없을 때다. 많은 사람들이 ‘대구에서 민주당 유세는 돌을 맞는다는 말이 떠돌 당시이다. 그러나 그는 마치 잔다르크가 프랑스 샤롤 왕세자를 도와 프랑스-잉글랜드 100년 전쟁에 참여하여 샤롤 7세를 옹립하는 것 같이 대구에 나타나 선거유세에 가담한다. 잔다르크가 프랑스 동레미라는 작은 마을 소작농 딸인 것에 비유하여, 추미애는 대구의 한 작은 세탁소의 둘째 딸이라는 서민적인 향수가 풍긴다. 그는 대구에서 김대중에 대한 명성을 크게 뒤집지는 못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선거유세로 ‘추다르크’라는 명칭을 얻었다.
‘잔다르크 유세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남편 서성환(61) 변호사라 한다. 혼자서 마이크를 잡고 지역감정과 싸워야 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것이란다.
그는 남녀 간 깊은 사랑도 숙지한 인물인 것으로 드러난다. 남편과 한양대학교 법학과 같은 클래스메이트(Classmate)로 자그마치 7년의 긴 열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고 한다. 남편 고향은 전북 정읍 출신이다. 고로 ‘대구의 딸, 호남 며느리’라는 별칭이 또 있다. 그는 그 남편과 결혼한 이유에 대해 “그 때는 묻지도 않고 따지도 않고 결혼했던 것 같아요. 생활과 현실은 다르다는 걸 몰랐으니까(웃음)”라는 말로 열애의 결과를 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 먹은 마음은 쉽게 바꾸려하지 않는 것인가?
the300은 보도하고 있다.
추미애는 올해 초 더민주 최고위원회에서 “저는 일생 입당원서라고는 한 번밖에 안 써봤다"며 "호적을 함부로 바꿔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실제로 추미애는 DJ와 맺은 인연으로 들어간 민주당에서 당적을 한 번도 바꾼 적 없다.
이는 그의 '소신'과도 맞닿아있다. 추미애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소신을 지켜왔다. 2002년 16대 대선까지만 해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돈독한 관계였던 그는, 2003년 노 전 대통령이 대북송금사건에 대한 특검을 수용하면서 노 전 대통령과 갈라졌다. 노 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DJ를 배신했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이후 추미애는 민주당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추미애는 당을 버릴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저를 보고 기존 직업까지 버리고 정치에 들어온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당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대신 추미애는 탄핵이 부결된 후 삼보일배를 통해 속죄했다. 선거에서 떨어지고 나서 조용히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온 것도 속죄의 의미에 해당했다.(the300;2016.8.12.)
사람의 마음속에는 오기(傲氣)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능력은 부족하면서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 또는, 잘난 체하며 방자한 기운을 말한다고 하는데, 이런 기운이 발생하면 거의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아마도 추미애 신임대표가 크게 실수를 한 2003년의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과 2009년 노동법 개정안 날치기통과를 할 당시 오기라는 기운에 가로막혀 있지 않았을까 이해를 하려고 해본다. 어찌 사람이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저 우리들도 실수를 하며 사는 것이니 그 실수를 디딤돌로 하여 다시는 실수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도 생각이 나는 것은 공자(孔子)의 말씀 중 자신의 최고 제자였던 안회(顔回)를 두고 “노여운 감정을 남에게 옮기지 않고, 두 번 실수를 하지 않았다[不遷怒 不二過 불천노 불이과]”는 말씀이 스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출처;the300
참고가 된 원문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758659.html?_ns=t1
http://the300.mt.co.kr/newsView.html?no=2016081116567611430
http://news.mk.co.kr/newsRead.php?no=609434&year=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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