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고 또 적다(積多)

니가가라 하와이 이승만 찬양 시(詩)

삼 보 2016. 4. 5. 05:06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연구소인 자유경제원은 1996년 한국경제연구원 부설 자유기업센터로 출범했다. 1997년 사업 독립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비영리 재단법인으로 분리한다. 재산이 시민권보다 더 위라고 생각하는 뉴라이트(New Right=신우익)라고 보는 자유경제원은 지난해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당시에도 최선봉에 서서 단일교과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단체로 알려졌다. 이곳 사무총장 출신 전희경은 한국사교과서 국정화의 전도사로 불린다. 그는 4·13 제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9번에 안착한 상태로 보면 자유경제원이 박근혜정권과 얼마나 밀착한 상태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유경제원은 4일 '제1회 건국대통령 이승만 시 공모전'에서 최우수작과 입선작으로 상을 주고, 다시 빼앗는 것도 모자라 “해당 사안이 교묘한 서술을 통해 행사 취지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주최 측 및 다른 응모자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초래했다”며 “법적 조치를 포함해 강력히 대처할 것”이라고 했다는 뉴스가 황당하게 한다. 이번 공모전 심사위원장복거일(소설가) 다.

    심사위원을 비롯해서 그 위원장이 책임을 져야 옳은 것 같은데 시를 출품한 이를 벌하겠다면 후일 자유경제원을 어떻게 믿고 출품을 할 수 있을 것인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4042222085&code=940100&nv=stand

‘제1회 건국대통령 이승만 시 공모전’ 최우수상 ‘To the Promised Land’의 각 행 첫 문장 첫 글자를 세로로 읽으면
 ‘NIGAGARA HAWAII’(니가 가라 하와이)다. 입선작 ‘우남찬가’도 ‘한반도 분열/ 친일인사 고용 민족반역자’로 이어진다(출처; 경향신문)



    물론 그 두 작품이 그대로 읽으면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을 칭송하는 문장이 된다. 각 횡(橫=가로)으로 서술된 문장의 내용은 이승만을 칭송하는 글이 되지만, 앞 한 글자씩 따서 종(縱=세로)으로 읽으면, 이승만의 과거 못된 행적이 그대로 나타나는 숨은 뜻이 함유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의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체성(正體性)이 강한 이념은 쉽게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 되지만, 그른 것을 옳다고 인정하라면 인정할 수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이승만의 행적 중 옳게 일한 것은 독립운동당시 미국에서 고생할 때가 전부였다고 본다.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으로 와서 정치에 가담하고부터 거의 비틀어지기만 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두 달이 지난 10월 16일 본국 땅에 발을 딛기 전, 일본 토쿄에서 맥아더 장군,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만나 회합을 할 때,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한국민주당의 영수직을 거절한다. 그러나 1945년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된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초기에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 등 좌우익의 거의 모든 조직들이 참여하는 단체였지만, 친일파 처리에 대한 이견과, 이승만의 강한 반공주의로 인해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계 인사들은 모두 이 조직에서 탈퇴하게 만든다. 김일성을 위시한 북한이 공산화하고 있는 것에 대립각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승만은 미국의 힘을 이용해서 우익세력만 같이하겠다는 강한 집념을 지닌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발표 이후, 1946년 1월 8일 국론분열을 막기 위해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등 좌우익의 주요 정당이 모여 합의한 이른바 ‘4당 캄파(Kampa=정치조직활동)’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1946년 2월 8일에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확대 개편한다.

   1946년 2월 14일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해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소련군과 타협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의장직을 사퇴하고 지방 순회에 나섰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며, 1946년 6월 3일에는 정읍에서 “남쪽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조직이 필요”하다고 발언해 38선 이남에서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쪽은 관심조차 없고 오직 자신의 안녕만을 우선시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하자 1946년 12월 미국을 방문해 워싱턴에서 소련과의 타협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고, 때마침 1947년 3월 12일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활동이 국내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승만은 귀국길에 중국에 들렀고, 1947년 4월 21일 장제스[蔣介石]가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면서 건제함을 과시한다.

   1947년 9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고,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유엔 감시 하에서 실시되는 선거에 참여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단독으로 출마하여 무투표 당선된다. 1948년 5월 31일 국회가 소집되자 선출된 국회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가 의장에 선출되는 연장자 우선권? 그리고 7월 20일 국회 간접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할 때부터 대한민국은 위태로웠다.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일민주의를 내세웠다. 모든 사람은 국가 앞에서 평등해야 하며, 그 평등 위에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8년 12월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후 장면(張勉)은 주미한국대사로 간다.

   1949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으로 일본 및 총독부에협력하였던 인사들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고, 농지개혁을 추진·실시하였다.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북진통일론’을 주장해 북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군의 증강을 제한하였으나 미국의 도움 없이 직접 공군 창설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해 피란을 떠나 임시수도를 부산에 세웠고, 1951년 11월 19일 자유당을 조직하였다. 또한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있는 헌법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으로 개헌을 추진하였다. 개헌 추진 과정에서 야당이 반대하자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 계엄령을 실시하였고, 같은 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새로운 헌법에 의해 1952년 8월 5일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74.6%의 지지로 재차 당선되었다.


   미국의 정전협정 추진에 반대하며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하였고, 이로 인해 미국 정부와 갈등을 빚었지만, 정전협정에 반대하지는 않되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과 타협하였다. 정전협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조인하였다. 1954년에는 미국을 방문해 의회에서 연설을 하였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 관할 하에 두는 대신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약속받는 ‘한미합의의사록’을 체결하였다.

   1954년에는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해 대통령직 연임 제한 조항이 초대 대통령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도록 개정하였다. 1956년 5월 15일 새로 개정된 헌법에 근거해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56%의 득표로 당선,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전후 복구와 경제부흥을 위해 1956년 경제개발계획을 미국에 제출하였지만, 미국 정부의 거절로 실현되지 못 하였고, 1958년 경제개발계획의 입안과 실시를 위해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산업개발위원회는 1960년 1월 산업개발 3개년계획을 발표하였지만 곧 이은 4·19혁명으로 실행되지 못 하였다. 1958년 12월 24일에는 국가보안법 개정으로 미국 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 이기붕과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였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중 사망해 무투표 당선되었다. 하지만 3·15부정선거로 4·19혁명이 발발하자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梨花莊)에 잠시 머물다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있었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발췌)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제1회 건국대통령 이승만 시 공모전'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폄훼하고 비난한 두편의

시가 최우수상과 입선작으로 수상된 것이 뒤늦게 확인됐다. (사진=인터넷 커뮤니티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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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백의겨레가 함께해야 한다는 백범 김구(金九; 1876(고종 13)∼1949.) 선생과 달리 이승만은 국민은 안중에 없었고 오직 자신의 영달만이 앞서야 하는 노옹(老翁)의 고집이 가득한 나머지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기를 바란 사람 같았다. 그의 이념은 자유주의라고 하지만 국민 속에서 독재자로 더 잘 알려진 것으로 보면 우리들의 귀감이 될 수 없는 인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자유경제원은 이승만의 이념과 그의 정체성을 따르고 싶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신들의 생각과 같이 모든 이들이 같은 이념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은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심사를 했으면 준 상을 걷어 들이고, 법을 이용해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어리석은 짓을 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참으로 가소롭지 않은가?

    자유경제원은 이승만을 기리는 집단이 아니라, 결국 그 휘(諱=지위가 높은 이의 이름)를 시궁창으로 던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인가? 나만의 이념이 불러온 더러운 유산 아닌가?

 


 

출처; 뉴데일이





  참고가 된 원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1770&cid=46626&categoryId=46626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8228&cid=40942&categoryId=31645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2534&cid=46626&categoryId=46626

http://blog.naver.com/tleowndtla/220644134803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9378&cid=40942&categoryId=31645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06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