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궁금해서

중국 시진핑이 더 고민이 깊다?

삼 보 2016. 1. 13. 05:20

     2016년 새해 벽두(劈頭)부터 한반도에 스산한 전율이 일고 있었다. 박근혜정권에게 닥쳐올 것이 온 것인가? 끝내 국민에게 호된 경고를 던진 북한이다. 말이 북한수소탄실험이지 그 폭탄이 한반도에 떨어진다면 반쪽이 날아갈 만한 위력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직감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정권은 물론 국제사회에서조차 엉성한 반응만 있을 뿐 대항할만한 세력이 없어 보인다. 말로만 한·미·일 3국 동맹이지 북한 핵실험이 3차(2013)까지 올 때도 무엇을 했는지 남아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북한이 1차(2006) 핵실험을 하고 세계는 심한 경기(驚氣=어린아이가 놀라서 몸이 비틀리는 증세)를 보이는 듯싶더니 이내 가라앉았다. 2차(2009) 때도 그랬다. 3차에서도 UN은 북한 제재수위를 높인다고 했지만, 높여진 것이라고 하기에는 북한이 너무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4차에는 수소탄실험이라고, 백만 배 이상으로 세상을 거머쥐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정권은 감히 손도 못 대고 그저 북한 주위만 뱅글뱅글 돌고 있을 뿐 결코 해낼 것이라고는 없을 것만 같다. 당연하다. 그 능력으로는 가당찮기 때문이다. 미국인들 할 수 있다고 보는가?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제3국에 제재)? 미국이 할 수 있었으면 처음부터 했지! 어림도 없다고 보지 않는가? 단지 중국뿐이다.


    그런데 중국이 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왜? 그동안 ‘북한의 중국창고’에 쌓아둔 것들이 얼마인데 중국이 북한을 제재를 할 수 있다고 보는가? 만일 북한을 중국이 제재한다면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단연 미국에게 동조하는 꼴이 되는데 중국이 할 수 있다고 보는가? 말도 되지 않는다. 그저 어쩔 수 없으니 박정권이 이리저리 뛰고 있을 뿐이다. 북한은 6자회담을 거부한지 오래건만, 6자회담 한국 수석대표인 황준국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13일 서울에서 한·미·일 3국 수석대표 협의를 하고, 14일엔 베이징에서 중국 쪽 수석대표인 우다웨이 한반도사무특별대표와 만난다고 한다. 19일엔 모스크바로 가서 러시아 쪽 수석대표인 이고리 모르굴로프 외교차관과 양자 회동할 예정이다. 단지 북한만 제외한 5자 수석대표가 연쇄 회동하는 격인데 어쩌자는 것인가? 좋은 성과가 있었으면 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바랄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이 손을 쓰지 않는 한 아무 효과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북한으로 가는 90%p 오일(oil)만 끊어준다면 간단히 해결될 사안이다. 기름만이 아닌 북한의 숨통을 쥔 중국이다. 하지만 중국이 절대 끊을 수 없는 처지다. 고로 시진핑(習近平)이 朴과 전화연결도 시키지 말라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 개통한 한·중 국방장관 간 군사 핫라인도 6일부터 일주일동안 먹통이다. 박근혜가 미국 오바마회동은 4번을 했지만 시진핑과 6차례나 만났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남아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단지 과거일 뿐이다. 지난해 중국 전승절 행사에 서방지도자 대부분이 불참했지만, 朴은 참석해 시 주석과 함께 열병식을 참관하고도 빛바랜 상태이다. 왜? 북한에 중국이 판을 벌려 논 것보다 우리판은 조족지혈(鳥足之血=새 발의 피)이기 때문이다.

만일 북한을 제재한다면 그 혜택은 고스란히 미국으로 돌아가고 만다. 중국이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중국도 호랑이새끼를 길렀다고 땅을 치고 있는 중이다.


    북한과 중국 관계를 보면 1949년에 수교이후, 중국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인민의용군을 북한에 파병하고 수많은 중국인의 피를 북한 땅에 뿌렸다. 1953년에는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여, 경제·문화협조 및 지원 협정을 체결하였다. 1954년 북한과 중국 양자 간 총 교역액은 약 8,000만 달러로, 중국 총 교역액의 약 3.4%에 불과했다. 그러나 1958년에는 중요물자 공급 협정 및 차관제공 협정을 체결한다.

    1960년대~1970년대 중국과 소련이 갈등을 겪던 당시 중국과 소련은 서로 북한을 자기편으로 하려고 했다. 고로 1961년 7월에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북·중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다. 1961년 11월에는 통상 및 항해조약을 체결한다. 1971년 9월에는 무상 군사원조(대략 3억~4억 달러) 협정을 체결했고, 1973년 6월에는 경제기술협조 협정을 체결한다. 그야말로 아버지와 아들나라가 된다고 했다. 또한 1963년 9월에는 류샤오치(劉少奇) 국가 주석이 북한을 방문, 1975년 4월에는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 1978년 5월에는 화궈펑(華國鋒) 당주석 겸 총리가 북한을 방문했다. 1978년 8월에는 중국의 군사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하여 친선을 도모한다.


    1970년대 말부터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 정치·외교·안보 분야에서 북한을 지지 협력함으로써 소련과 미국으로부터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 1984년 북한의 3자회담 제의를 지지하고,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 등 국제무대에서 북한의 입지를 지지한다. 이 당시 북·중 최고지도자들 간 교류가 빈번하며, 김일성은 1982년, 1984년, 1991년에 중국을 방문했고, 펑전(彭眞)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 상무위원장이 1983년에 북한을 방문하였으며, 양상쿤(楊尙昆) 국가 주석이 1988년과 1992년에 북한을 방문했다. 또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는 1989년에 북한방문, 장쩌민(江澤民) 총서기는 1990년에 북한을 방문했고, 리펑(李鵬) 총리가 1991년에 북한을 방문했다.

    하지만 경제 등 실질 분야에서는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서방세계와의 실리적 관계가 강화됨에 따라 북한 관계가 조금 멀어진다. 1990년 한·중 간 직교역 총액이 19억 달러로 전년 대비 117%p 증가한 데 비해, 북·중 간 교역액은 4억 8,0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13%p 하락하기 시작한다.


   중국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안정된 주변 환경을 구축하면서, 북한의 급격한 몰락에 미국의 대(對)북 영향력 확대를 견제한다는 전략 하에 북한과의 관계는 정립하고 있었다. 고로 한·중 수교 이전, 북·중은 제반 측면에서 여타국보다 특별한 관계를 지속한 것이다. 중국은 북한과의 전통적 우호·협력 관계를 거듭 강조하며 북한체제유지를 지원하고 있었다. 양측은 공산당(노동당)은 물론 외교부간 대표단의 연례적 교환 방문 등 매년 당, 정, 군 사이에 상호방문을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그러나 1992년 8월 한·중 수교 이후 북·중 관계가 전반적으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한다. 구소련의 냉전종식에 따라 군사적 동맹의식이 서서히 벗어나며,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펼침에 따른 이념적 결속력도 약화된다. 한·중관계가 지속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북한의 대(對)중 신뢰감은 저하된다. 게다가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 류샤오치(劉少奇), 장첸(張震), 북한의 김일성, 최광, 김광진 등 양측 혁명세력들이 사망 또는 퇴진에 따라 지도층 간 유대감도 약화된다. 또한 1997년 황장엽 사건 및 타이완[臺灣] 핵폐기물의 북한 반입시도와 관련하여 북·중 간 갈등을 겪는다. 결국 1997년 8월 이후 개최해 온 4자회담 예비회담과 본회담 등에서 북한은 중국을 배제하려 시도했고, 중국과의 실질협의를 회피하여 북·중 간 불협화음이 드러난다. 이에 따라 양측 간 주요 인사의 교류가 줄어들게 된다.


    1998년 9월에 북한의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한 이후, 양측 간 고위인사 교류를 복원함으로써 관계가 회복된다. 1999년 6월에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중국방문, 1999년 10월에는 탕자쉬안(唐家璇) 외교부장이 북한방문, 2000년 3월에는 백남순 북한 외무상이 중국을 방문했다. 2000년 5월과 2001년 1월에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하고, 2001년 9월에 장쩌민(江澤民) 국가 주석이 북한을 방문, 양국 관계가 회복한다. 2003년 10월에는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 상무위원장이 북한을 방문한다.

    또한, 2004년 4월 김정일의 중국 방문과 북·중 수교(1949년 10월 6일) 55주년을 계기로 양국 간 친선·실무 대표단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교역 및 경제협력도 대폭 증가한다. 수교 55주년을 계기로 2004년 9월에 리창춘(李長春) 중국 당정치국 상무위원이 북한을 방문하고, 2004년 10월에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했다. 이로써 양국은 친선관계 및 협력강화 방침을 재천명한다.

    양측은 2005년 들어 당·정 교류가 활발하였는데, 2005년 2월에 왕자루이(王家瑞)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북한을 방문했고, 2005년 3월에 박봉주 북한 총리가 중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2005년 7월에는 탕자쉬안 국무위원이 북한을 방문했으며, 2005년 10월에는 우이(吳儀) 중국 부총리가 북한을 방문한다. 특히, 2005년 10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방북이 북·중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대외적으로 과시한다.


    2006년 7월에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고, 2006년 10월에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한 이후, 북한이 일방적으로 상황을 악화시켜 중국은 최초 대(對)북 비난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찬성을 했다. 결국 북·중 관계는 원활할 수 없었다. 중국이 기른 호랑이새끼를 최초로 세계시장에서 발로 걷어찬 겪이다.

    그러나 2007년 2월 13일 제5차 6자회담[베이징(北京) 개최]에서 북한이 핵 비확산에 합의한 이후, 2007년 7월 양제츠(楊潔篪) 중국 외교부장의 방북, 2007년 10월 류윈샨(劉雲山) 중국 공산당 선전부장의 방북 등을 통해 양국 정치관계가 정상화된다.

    2008년 이후에는 양국 간 공산당, 외교부 및 부총리급 이상 고위급 지도자의 교류가 빈번해진다. 2008년 1월에는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북한을 방문했고, 2008년 3월에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주 북한 중국 대사관을 방문한다. 2008년 4월에는 박의춘 북한 외무상이 중국을 방문하였고, 2008년 6월에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이 북한을 방문했으며, 2008년 8월에는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베이징 올림픽(Olympic) 개막식에 참석했다.

    2009년 ‘북한·중국 우호의 해’ 개막식에는 김영일 총리가 중국을 방문하여 참석하고, 폐회식에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북한을 방문하여 참석하였다. 아울러 중국의 다이빙궈(戴秉國) 국무위원, 량광례(梁光烈) 국방부장 등도 북한을 방문하였으며, 북한의 최태복 서기, 김정각 국방위원, 주상성 인민보안상 등도 중국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호랑이새끼는 2009년 4월에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고, 2009년 5월에 제2차 핵실험을 했다. 양국 간에 다소 소원한 조짐이 나타나기는 했으나 2009년 10월 원자바오 총리가 북한을 방문한 것을 기점으로 양국 간의 전통적인 우호 협력관계가 쉽게 회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압록강 신교 건설, 중국의 창지투(長吉圖) 개발 계획 추진 등을 통해 북·중 간 경제개발 협력이 모색된다.

    한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0년 5월, 2010년 8월, 2011년 5월에 비공식적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2011년 8월에 러시아 방문 후 귀국길에 중국을 방문하면서, 북한은 북·중 간 전통적 우호관계에 대해 세대를 이어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결국 중국은 ‘전통계승, 미래지향, 선린우호, 협력강화’의 정신 하에, 고위급 교류 강화, 경제사회발전 촉진을 위한 경험교류, 호혜협력 확대, 국제·지역 정세 및 중대 문제에 대한 소통 강화 등을 제안했다.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Korea Trade-Investment Promotion Agency) 통계에 따르면 중국은 북한의 최대 교역 및 외자유치 대상국으로서 북한의 대(對)중 무역의존도는 2009년 78.5%에서 2010년 83.0%로 증가한 것으로 나온다. 특히, 5.24 조치 이후 북한은 1차 산품(무연탄 등) 수출, 주요 물자 수입(원유(90%p), 비료, 식량 등)의 무역구조를 지속하고 있다.

    중국이 북한 핵실험을 완전히 차단할 계획이 있었다면 1차 실험 당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중국과 꾸준한 외교력으로 중국을 구워삶고 만다. 3차 실험 당시에도 시진핑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막지 못했다. 그리고 북한 김정은은 지난해 12월 10일 베이징으로 북한의 걸그룹인 모란봉악단을 비롯하여 100명의 합창단을 중국고위층의 위로수단으로 보냈으나 시진핑은 단호히 거절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1월6일 4차 핵실험을 하고 수소탄실험이라고 야단법석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시진핑은 지금 호랑이새끼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 중이다. 중국이 북한에 대한 무상원조를 하며 북한은 동조하고 있다지만, 북한이 핵을 갖는 것만은 인정할 수도 없고,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권력이 동일하게 되는 것을 아버지가 질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하지만 북한이 수소탄실험을 성공리에 끝냈다면 중국도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호랑이새끼에게 할퀸 겪이고, 한·미·일은 닭 쫓던 개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중국 시진핑이 더 고민이 깊을 수 있지 않을까?



  출처;세계일보



  참고가 된 원문

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cid=1033730&iid=49118522&oid=022&aid=0002993902&ptype=052

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cid=1033730&iid=4467477&oid=028&aid=0002303373&ptype=052

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cid=1033730&iid=49082616&oid=022&aid=0002993759&ptype=05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87345&cid=43792&categoryId=437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