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상 사

시리아 내전이 세상을 뒤바꿔?

삼 보 2015. 9. 14. 07:33

     시리아는 로마 속에 있었다

   공식 명으로는 ‘수리야 아랍공화국’이지만 쉽게 ‘시리아’로 통하는 나라.

   수도는 다마스쿠스(Damascus) 혹은 ‘다마슈크’ ‘앗샴’이라 하기도 하는데, 영화에 자주 그 이름이 거명되어 더 가깝게 들리는 역사가 깊은 다마스쿠스 도시의 주위에는 지금 반정부군들이 집결돼 있는 상태라고 했다. 시리아가 독재자들로부터 해방을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마스쿠스는 이슬람문화의 4대 도시(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중 하나로 이슬람 학자들의 수련장으로 유명하다.

   그 도시는 십자군 원정 당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메소포타마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무역통로와 아라비아 반도를 연결해주는 교통의 중심지였으니 역사적으로 시리아의 입지를 알만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로마시대를 거친 역사가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는 다마스쿠스의 바자르(Bazaar=지붕이 덮인 시장이란 뜻)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 속에 지금도 로마의 역사가 그대로 자리하고 있는 국가다.

 


   시리아 전체 인구 2,331만 명 중 1/4 정도보다 다소 더 많은 555만 명 정도가 다마스쿠스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제 전체 국민이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다. 확실치는 않으나 유엔 공식 집계로 시리아 난민 전체 수는 1,160만 명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또한 2011년부터 지금까지 내전을 치르면서 집계된 사망자는 대략 22만 명으로 나오고 있다.

   시리아 국민 총생산(GDP)에서 볼 때 개인 당 부(富)는 5040달러로 세계 200여 국 중 136위에 속하고 있다. 시리아 전체 땅 넓이는 185,180평방km이지만 대부분이 사막과 불모지며 관개 농경지는 1/10도 채 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지중해 쪽에 속한 곳을 제외하고 남쪽은 사막과 험준한 산악지대로 된 이 땅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기름진 골란고원도 있었다.


 

   빼앗긴 골란고원

   평균 해발고도 1,000m의 골란고원에는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와 유대인 정착촌을 30 군데나 두어 살고 있다 한다. 1967년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빼앗은 상태지만 그 경계가 모호해 항상 불안에 떨어야 할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 골란고원은 다마스쿠스 남쪽에 있고, 서쪽은 요르단 강(江)과 계곡, 남쪽은 야르무크 강(江)이 계곡을 끼고 있다. 골란고원은 기후는 건조하나 토지는 비옥해서 채소 ·과일 ·밀 재배가 잘 된다. 안티레바논산맥의 남단에 솟은 헤르몬산(2,814m)에서 눈 녹은 물이 흘러와 농경지를 적셔주어 땅이 비옥하다고 한다. 성서에 나오는 고대 도시 골란은 지금의 골란 지역 서부의 하우란 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두산백과는 예측하고 있다.

 

 


   간략 시리아 근대사

   근대사로 볼 때 시리아는 1920년 7월부터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아랍통합사상이 강화됐고, 반식민지, 반제국주의운동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1년 세계 제2차 대전 중 시리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프랑스 위임통치가 쉽게 끝나지 않았고, 1945년 10월 UN에 가입하면서 독립이 인정되어, 1946년 4월 시리아는 완전히 독립을 하게 된다. 올바른 지도자가 등장하지 못한 시리아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1958년 2월 이집트에 병합되어 ‘통일아랍공화국’이 된다. 그러나 1961년 쿠데타(한국의 5·15쿠데타와는 성격이 달랐다. 같은 해 박정희는 민주당 정부를 엎어버렸으나, 시리아는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쿠데타)를 일으켜 곧바로 독립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후 10년간 5차례의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1970년 무혈쿠데타로 하페즈 알 아사드가 정권을 휘어잡으면서 1971년부터는 장기집권체제에 들어간다.

 


   시리아 독재의 원흉 하페즈 알 아사드(Hafes Al-Assad)

   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의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부터 알아본다.

   ‘아사드’란 아랍어로 ‘사자’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단다. 북부 해안도시 카르다하에 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하페즈는 195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바트당에 입당하여 1963년부터 쿠데타의 요직을 맡게 된다. 1965년 공군사령관에 임명된 후 국방장관에 올라선다. 그리고 무혈쿠데타로 권력을 거머쥐게 된다. 하페즈는 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며 이스라엘과 아랍 간 적대관계를 이끈 핵심적인 인물로서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책략을 소유한 인물로 ‘아랍의 비스마르크’로 불러지기도 했다. 이익이 있으면 간 쓸게도 다 내버릴 정도의 인물로서 구(舊) 소련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원조를 받아오기도 했고, 걸프전에선 연합군 편에 서서 실리를 얻어낸 인물이다. 2000년 그가 70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뜰 때까지 30년을 장기집권하면서 시리아 독재의 탑을 세워 논 인물이다.


 

   시리아 독재의 아버지를 이은 바샤르 알 아사드(Bashar Al·Assad) 현 대통령

   바샤르는 원래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의사가 되기 위해 1988년 다마스쿠스 대학교 안과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2년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의학공부를 계속했다. 2년 후 하페즈는 바샤르의 형 바셀 알 아사드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하직하자, 바샤르를 1994년 영국으로부터 귀국을 시켜 시리아 군에 입대시키고 군 장교 수업을 시켰다. 그리고 바샤르는 군 안과에서 근무한다. 1999년 1월 대령으로 진급했다. 동생 마헤르 알 아사드(Maher Al-Assad)가 지휘권을 갖고 있던 시리아 공화국 수비대 지휘권을 갖게 된다. 2000년 아버지 하페즈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자 바샤르는 바트당에 입당하고 군대 지휘권을 확보한다. 그리고 아버지 하페즈의 뒤를 이어 시리아 대통령에 당선된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아버지 하페즈의 30년 독재의 서광을 받아 96.2%p의 지지율을 얻어 대통령에 당선 됐다는 것이다. 하기야 7년 후에도 96.6%p의 지지율을 얻어 대통령이 됐으니 아마도 정권만이 아는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바샤르는 189cm의 훤칠한 키에 영어에 능통하고 프랑스어도 표현할 정도이지만, 워싱턴포스트지 선정 ‘세계 최악 독재자’ 순위 12위에 등극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로 시리아가 테러지원국임을 세계에 알려주고 있었다. 시리아는 북한 핵개발 협력국가이기도하지만 2009년엔 미국과 관계개선을 시도한 바샤르의 외교술을 보면 가히 아버지 하페즈의 영향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재스민혁명(Jasmine Revolution)은 아랍과 아프리카 독재정권 타도의 불씨

   북아프리카 튀니지(Tunisia)의 남동부 지방의 시디 부지드의 20대 청년은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을 할 수 없어 애를 끓다가 생각해낸 것이 거리에서 무허가 노점상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먹고 살기위해 벌린 노점상을 경찰이 단속하자 더 이상 세상에서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것을 느낀 나머지 분신자살을 하고 만다. 23년 간 기나긴 독재자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Zine El-Abidine Ben Ali)의 정권하에서는 청년실업자가 둘 중 하나 꼴이 된지 오래였다. 청년 실업자가 노점상 단속에 못 배겨 분신자살이 된 사연을 들은 청년들은 너나할 것 없이 분통을 터트리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때가 2010년 12월이다. 시민들은 집권층의 부정부패 등에 크게 궐기했다. 독재타도를 외치며 터지기 시작한 군중의 물결은 바로 노도로 변해 전국적으로 퍼졌고 급기야 벤 알리는 2011년 1월14일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하고 만다. 튀니지의 23년 독재가 무너진 것이 재스민혁명 혹은 튀니스혁명으로 부른다.

   재스민 꽃향기가 그윽할 때 치러진 튀니스혁명의 열매가 맺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재스민혁명 이후 때를 같이 한 이웃 나라들 이집트, 알제리, 예멘,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쿠웨이트 등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시리아의 내전 원인은 바샤르 알 아사드의 어리석음이다

   시리아 내전의 발단은 2011년 3월 시리아 남부 도시 데라(Derra)에서 대략 15명 정도의 학생들이 재스민혁명 구호를 벽에 쓴 것이 발단이다. 시리아 경찰은 구호를 적은 학생들을 색출해 냈고 체포와 동시 고문을 시작했다. 데라 시민들은 학생들의 고문에 대한 자극을 받아 시위에 나섰다. 민주주의와 자유보장을 외치기 시작했다. 문제는 정부군이 등장하며 과잉진압이다.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은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시민 4명이 사망했다. 성난 군중은 뭉쳤다. 그리고 봉기했다. 그러나 정부군도 만만치 않게 탱크를 앞세웠다. 바샤르 대통령의 동생 마헤르(Maher)가 이끄는 정부군은 위협을 넘어 탱크의 포격을 가해 주택가를 폭발시켰다. 수십 명이 죽었다. 군중의 궐기는 데라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활동하던 반정부 주의자 갈리운(Ghalioun)이 귀국하며 압둘아짐(Abdul Azim) 등이 합류해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에 반정부군 거점을 형성했다.

   바샤르 정부군 중 일부가 탈영하여 반정부군에 투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샤르 정부군은 한 층 더 강경한 자세로 나가고 있었다. 결국 국제사회가 2012년 6월 시리아사태를 두고 내전으로 인정하고 만다. 2012년부터 2013년 초까지 정부군은 반군의 거점인 홈스를 장악했고, 내전 종식으로 가는 것으로 알았으나 시리아 내전은 지금껏 이어지며 국민을 쫓아내고 있는 중이다.

   시리아 독재 30년의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를 이어 15년 독재정치를 하고 있는 그 아들 바샤르가 퇴임을 하든지 망명을 가야 시리아가 안정을 찾을 것이지만 바샤르와 그 동생 마헤르의 권력이 내전 5년을 이어가며 아직도 싱싱하다.


 

   세계는 더 이상 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벌써 외국으로 유입된 난민만 20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시리아 전체 인구 2,331만 명 중 유엔에서 발표한 1,160만 명 중 1/6 정도 난민들이 찾아간 나라들 외에 떠돌고 있는 난민들의 앞날이 막연하기만 하다.

   독일도 더 이상 난민을 받아들이기에는 힘들어 하는 입장이다. 동유럽은 벌써부터 엄살을 부렸고, 특히 헝가리 총리는 노골적으로 난민 거부 중이다. 폴란드는 가톨릭 신자들이 무슬림의 이념에 겁먹은 생태다. 서 유럽에서도 언제까지 난민구호를 외치며 받아들일 것인가? 이젠 미국을 비롯해서 세계 각국에서 받아야 할 상황까지 가는 것 같다. 그러기 전 국제사회는 머리를 모아야 할 것으로 본다.

   각국에서 난민을 받는 것보다 더 이상 난민이 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시리아를 비롯해서 아프가니스탄 등 독재자를 축축해야 할 것으로 본다. 특히 미국은 시리아 바샤르 알 아사드의 몰지각한 외교를 떨쳐내고 그를 시리아로부터 몰아내야 할 것이다.

   고향을 버린 이스라엘 민족이 세계 각처에서 뿔뿔이 헤어져 산지 2000년이 지난 세월 이후 그 후손들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지금 온전하게 잘 살고 있는가?

 


   유엔은 현재 세계로 흩어지려는 이방인들을 더 이상 만들게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장 시급한 시리아 독재정권부터 타도해야 세계가 숨을 쉴 수 있지 않겠는가! 러시아가 시리아 정권 편에 붙어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 시리아는 더 이상 세계를 이간질해선 안 된다.

   독재가 세상을 뒤집은 것이다. 그 독재의 뿌리를 이젠 뽑아줘야 할 때다. 세계는 자국의 이득 이전에 인간의 근본인 자연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하페즈 알 아사드(좌)와 바샤르 현 시리아 대통령(위키백과에서)



  참고가 된 원문

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D%8E%98%EC%A6%88_%EC%95%8C%EC%95%84%EC%82%AC%EB%93%9C

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C%83%A4%EB%A5%B4_%EC%95%8C%EC%95%84%EC%82%AC%EB%93%9C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3674&cid=40942&categoryId=40713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0918&cid=42147&categoryId=42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