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상 사

삼일독립운동과 용서 못할 박정희

삼 보 2015. 3. 1. 08:54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1월 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의 제28대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2.28 ~ 1924.2.3) 대통령은 전후 처리 지침으로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했다. 당시 한민족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고 본다. 해외에 나가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최대한 살리기로 하고 대동단결을 부르짖는다.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중심이 돼 독립운동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으며, 국내에서도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종교계와 학생들에 의해 각각 추진되고 있었다. 일제의 한국강제점령 직후 한민족의 조직적인 독립운동 조짐을 본 일제는 그 동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치성을 띠고 있던 모든 사회단체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있었다. 그래도 1919년 3․1운동의 초기 당시에는 미약하나마 작은 조직과 단체가 유지할 수 있었다. 이유는 종교계와 학생들이 주도한 단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1918년 말 재일 조선유학생 학우회 망년회와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을 결의한 유학생들은 최팔용(崔八鏞) 등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2․8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듬해 일본 동경에서 한국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있은 이 후, 결국 국내에 들어와 3·1운동으로 변하게 된 계기가 된다.

   독립운동을 기획하며 추진하던 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인 박희도(朴熙道)에 의해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한다는 사실을 접한다. 이에 학생 대표들은 2월 25일 회의를 열어, 3월 1일 탑골공원에 집결하는 것으로 하되, 상황에 따라 학생회 독자적으로 독립선언 대회를 개최할 수 있다는 것도 결정했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학생이 참여하는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됐다. 이들은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고,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송계백(宋繼白)을 밀사로 파견하여 거사 소식을 알림으로써 국내 독립운동 진영의 3․1운동 계획을 본격화시켜 갔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며, 민족대표들의 합의하에 원고는 정리됐다.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普成社)에서 사장 이종일의 책임 하에 2만 1천여 매가 인쇄를 마친다.


   1919년 3월1일 오후 두 시 태화관에는 민족 대표 33인 중 사정상 4인이 빠진 29인이 모여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우리는 일본과 다른 자주민족임을 세계만방에 알림과 동시 독립을 해야 하는 이유를 들어가며 투쟁의 이유를 밝혔다. 한편 오후 두 시 반경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 집결한 수천 명의 학생단체는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한다. 그리고 태극기의 물결은 종로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간 시위대는 만세를 외치며 3․1운동은 불꽃이 튀기 시작한다. 시위대 중 한 단체는 덕수궁으로 들어가 광무황제의 영전에 조례하고, 또는 프랑스 영사관에 들어간 단체는 한국인의 독립의사를 프랑스에 알려 줄 것을 요구했다. 미국 영사관 앞에서는 독립을 갈망하는 혈서를 들고 시위를 했다. 결국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은 서울과 달리 본격적인 시위는 나타나지 못했다.



   그해 3월 20일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양대리 광명학교 여학생 3명이 친구들 80명과 함께 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치며 마을을 행진했다는 것이 발견됐다.(노컷뉴스;2012.2.29일자)

   양대리에 세워진 비문에는 ‘광명학교에서는 이미 삼월 십일부터 민원숙, 한도숙, 황현숙 세명의 어린 여학생이 주동하여 몰래 태극기를 만들고 이십일의 입장 장날에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다른 학생들과 결의하였다. 삼월 이십일 오전 열시 하얀 상복으로 갈아입은 세 여학생을 선두로 팔십여 명의 학생들은 교문을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양대시장으로 향하였다’고 적혀있다고 노컷뉴스는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3명의 소녀들은 1년 동안 공주형무소에서 갖은 고초를 겪어야했다. 이 사건은 당시 공주지방법원의 판결문과 헌병대 보고서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 당시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이들에게 주어진 강인한 신념은 무엇인가? 이 소녀들은 민족대표 33인중 하나였던 신홍식 목사가 시무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그 신앙이 이들에게 힘을 실어 준 것으로 신문을 보도하고 있다. 또한 민족 운동가이자 스승이었던 임영신 선생과 꾸준히 기도모임을 한 것이 동력이 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는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보다는 후일 자신의 고향에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3·1독립운동으로 서울의 일본 경찰들의 경계는 그야말로 삼엄했다.

   먼저 3월 13일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한다.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다. 우선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그리고 부친의 주선으로 감리교 동면 속회장인 조인원(趙仁元)과 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들과 의논하여 만세 시위운동의 구체적 방침을 세워 나갔다.


   결국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계획 추진 총본부는 용두리 지렁이골(芝靈里)에, 중앙 연락기관은 장명리와 백전리에 두었다. 이 밖에도 천안 장을 보러 다니는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의 각 면과 촌에도 연락기관을 두고 대규모 만세 시위운동 계획을 추진하여 갔다. 특히 유림의 대표들과 집성촌 대표들을 움직여 시위 참가 인원을 더욱 확보하도록 했다.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드디어 4월1일 각 면과 동시에 거사를 하기 위해 봉화에 불을 붙였다. 유관순 열사는 아우내장터에서 연설로 시위대에 힘을 실어준다. 10년 동안 일본으로부터 갖은 학대와 멸시를 당한 사실을 공개하며 다 함께 궐기할 것을 부르짖는다. 갑자기 장터는 만세시위로 변하고 수백 명의 군중이 수천 명으로 뭉쳐지고 만다. 수천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자 일본 헌병들이 들이 닥쳐 총을 쏘고 총검을 한다. 시위대는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일본 헌병과 수비대가 총검으로 시위 운동자들을 학살함에 따라 이 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때 유관순 열사 아버지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한다. 이를 본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들다가 유관순 열사 어머니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유관순 열사 작은 아버지 유중무(柳重武)와 조인원, 조병호(趙炳鎬) 부자, 김용이(金用伊) 등과 함께 군중들을 이끌고, 부친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항의 시위를 계속한다.


   주재소 앞에서 항의하다 결국 헌병들의 총탄에 시위군중은 쓰러지고 만다. 결국 그 날 저녁 유관순 열사,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되며 천안헌병대로 압송되고 만다. 그로부터 유관순 열사는 일본의 고문에 반항하며 독립만세를 더욱 소리 높여 외친다. 모든 것은 자신이 먼저 주동한 것이니 다른 이들은 석방하라며 일제 형사들에게 훈계한다. 나라를 빼앗긴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 나라를 도둑질 한 일제가 죄인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발언하기도 한다. 특히 공주감옥으로 옮겨졌을 때는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면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동하다가 잡혀 온 오빠 유관옥(柳寬玉)을 만난다.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열사는 여기에서도 아침저녁으로 독립만세를 큰 소리로 외친다.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려는 목적이다. 결국 고문에 이기지 못하고 매를 맞아 생긴 독[杖毒(장독)]으로 인해 1920년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게 된다.


   일본의 우리에 대한 과거 역사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가시질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얼마나 될까?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 서부의 한 도시 글렌데일 시의회 앞에 있는 위안부 소녀상을 철거하지 못해 생 발광을 하고 있다. 결국 일제 전쟁광도들의 잘 못을 시인하는 셈이지만 고개를 숙일 줄 모른다.

   LA연방지방법원(담당판사 마이클 린필드)은 지난 해 9월 일본계 단체인 '역사의 진실을 추구하는 글로벌 연합(GAHT)'이 글렌데일 시를 상대로 낸 소녀상 철거 및 시조례 위반 소송에 대해 2015년 2월23일 또다시 시의 손을 들어주고 원고 기각시키고 말았다. 저들은 지난해 2월에도 '글렌데일 시가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일본군 성노예를 주제로 한 상징물을 세웠다'며 철거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소송은 6개월 후 증거불충분으로 기각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저들(GAHT)은 판결에 응할 수 없다며 연방 제9순회항소법원에 항소 했고(LA연방지방법원에 글렌데일의 행정적 태만과 시 조례 위반을 이유로 새로운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이 두 번째 '패배'인 셈이다. 법원의 기각판결은 이번에도 '증거'의 승리였다고 본다.


법원은 판결문 서문에서 "일본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벌인 잔혹한 전쟁범죄를 정당화할 수 있는 논쟁은 있을 수 없다"며 "글렌데일 시는 소녀상을 외교문제에 이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소녀상을 세운 것이 연방정부의 외교방침과 완전히 일치한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일본정부도 인정하고 있는 과거사"라고 기각판결 이유를 밝혔다.(LA중앙일보;2.23.2015)


  라디오코리아에서(taeocho)



   일본 민족성이 뻔뻔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신들 주위를 치우고 깔끔하게 사는 것은 세상에서 본보기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가슴은 검기가 까마귀 깃보다 더 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에 붙어 차관을 들여와 우리 경제가 잘 살고 있다며 일본의 덕을 보고 있다고 하는 이들도 많다. 그런 사실을 부인하려 하지는 않는다. 인정한다. 이만큼 국가 수장은 앞뒤를 잘 선택하지 못하면 국민들로부터 평생 원망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한국에 위안부 할머니가 이제 겨우 55명 정도 생존해 계신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보상커녕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 없다. 박근혜가 아무리 일본과 겨루기를 해도 일본 아베 총리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 왜냐? 과거 박정희 정권에서 그 모든 것을 다 받아갔다고 하지 않는가? 실제적인 인물이 아닌 국가대 국가의 배상책임이 끝났다는 거다. 이에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는데, 박근혜가 끝까지 일본과 외교를 끊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를 생각했을 때 하는 말이다. 우리가 국내에 계시는 할머니들은 수시로 언론매체를 통해 접근할 수 있지만, 일본 동포는 볼 수 없으니 그 고통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뿐인가? 국가적인 손해도 생각해야 한다. 그만큼 그녀의 아버지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본과 수교를 한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수많은 국민이 일본과 수교를 하는 것에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 수교를 열지 않았다면 몰라도, 열어 논 상태이기에 외교가 거의 마비되고 있다는 것은 살얼음판을 걷는다고 보는 거다. 얼마나 현 박정권이 일본과 외교마찰을 할지 두고 볼 일이지만 참으로 암담한 면이 있음은 틀리지 않다고 본다. 뻔뻔한 일본과 수교부터 잘 못 된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서로 용서를 하고 풀 때도 된 것 같은 심정이다. 허나 일본인들의 뻔뻔함 때문에 일본과 우리는 물과 기름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보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가까운 나라이면서 먼 나라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일본과 수교를 끊겠다면 몰라도 말이다.


   과거 우리 선조들이 항일독립운동을 하면서 겪은 고초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던 박정희였다면 쉽게 수교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일본 천황에게 피로서 충성맹세를 한 과거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 장교가 됐다. 그리고 항일 독립투사들을 검거할 명령도 받는다. 그런 그였기에 지금 우리가 일본과 어려움에 대처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의 최고 수장에 대해 왜 우리가 크게 비중을 두고 있는지 이유가 나온다. 그만큼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가 국민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영달에만 치중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결국 지금 해방이 됐다고 해도 슬픈 대한민국에 멈춰 서있다는 것이다.




  참고가 된 원문

http://www.nocutnews.co.kr/news/919052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951243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9&contents_id=325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2035&cid=40942&categoryId=34318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3189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