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15일 "군 위안부 문제는 가슴 아픈 일"이라며 "고노(河野)담화(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한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를 부정하지 않으며 계승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한국 정부가 한일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군위안부 문제 해결의 진전된 조치나 구상을 밝히지 않은 채 "(군위안부 문제가) 정치, 외교문제가 되는 것은 안타깝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오후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총리관저에서 새누리당 서청원 의원을 비롯한 한일의원연맹 소속 한국 의원들을 28분간 면담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서 의원이 전했다.
이에 대해 서 의원은 "한일관계에 중요한 것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며,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이라고 강조했다. 또 군위안부 피해자들 평균 연령이 88.5세이고, 55명만 생존한 상황이라고 소개한 뒤 "아베 총리가 이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아베 총리에게) 전했다"고 밝혔다.
서 의원은 또 "금년이 한일수교 50주년이 되기 때문에 양국이 새 출발을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구두 메시지를 아베 총리에게 전했다.(연합뉴스;2015.1.15.)
1948년 12월23일 일본의 전쟁 광신자 도조 히데키와 A급 전범 7인이 이 세상에서 더는 발로 서게 할 수 없게 처형되고 난 다음날, 지금 제96대 아베 신조 일본 내각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날이다. 왜 그는 A급 전범에서 풀려났을까? 물론 전쟁을 일으키자는 광신자와는 좀 거리가 있었다는 것은 알만하다. 하지만 그도 일본의 괴뢰국이라 불러지는 만주국에서 1936년부터 4년 동안 젊음을 불태운 위인 아닌가? 아마도 그 당시 상황을 연합군 측에서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기시 노부스케는 도쿄 제국대를 나와 농상무성에서 입신이 시작된다. 그리고 총무처 차장의 위치에서 만주국으로 넘아갔다. 그의 두뇌는 새롭게 불타면서 일본을 위해 새로운 청사진을 제출했다. '산업 5개년 개발 계획'을 제출하면서 만주를 일본 괴뢰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획기적인 기획안이다. 일본군 엘리트와 관료 그리고 재계 지도자들을 위해 새로운 사회를 기획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사고와 제국주의적 실행이 섞어갈 수 있게 말이다. 중앙통제형을 바탕으로 개발독재 체제가 들어선 것이다. 계획 경제를 이루기 위해 농촌개혁을 해야 했고 중화학공업육성과 함께 수출을 주도해냈다.
고로 기시 노부스케는 중국인들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TV조선은 2014년1월22일자에 '아베 총리 외조부 기시노부스케 난징 대학살 깊이 관여'라는 제하에 중국 랴오닝 성 문서기록관에서 제출한 학살 사건 내용이 실려 있었다.
1937년 12월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할 당시만 해도 106만의 시민이 1938년 1월 제1차보고서에는 인구가 20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며 한달 새 어떤 달은 수만 명의 인명이 죽어간 것으로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당시 기시 노부스케가 현역 군인은 아니었으니 사살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생명의 주검들을 대량으로 실어나르며 일본의 강행에 동참했다는 증거가 있는 것이다.
4년의 만주국 상황을 마치고 일본으로 다시 귀국한 기시 노부스케는 이듬해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으로 성큼 올라선 것만 봐도 그의 행보는 남달랐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후 전쟁과 아주 관련이 많은 군수성 차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단지 이 때 전쟁을 더 할 수 없는 경제적 상황에 닿아 도조 히데키 총리에 맞선 적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결국 일본의 패망은 경제난이 가져온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 문제를 연합군 측에서 참고하여 기시 노부스케를 A급 전범에서 빼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간다. 기시 노부스케는 1957년 부터 1960년까지 제56대와 57대 일본 내각총리를 했다. 1960년 1월 19일 미국의 워싱턴 D.C.에서 체결된 미일 상호협력 및 안전보장 조약(일명 쇼와 35년 조약 6호, 또는 미일 안전보장조약)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 조약이 성사되고 미국 군인들은 일본 영토 안에서 시설 및 구역에 대한 미군 지역이 설치되고 그 안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 미군 기지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안 군중들은 들고 일어났다. 대규모 군중시위 등 사회 혼란에 책임을 지고 기시 노부스케는 정계에서 물러나 사회인이 된다. 그러나 그가 총리 재임 시절 꿈꾸던 것이 있었다.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일본 국민 고유의 '평화헌법'이 잘 못 됐다는 것이다. 그 발언으로 국민의 노여움을 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본 인들은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본다. 물론 그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으나 고치라는 쪽도 대단하게 넓게 퍼져가고 있다. 아베 신조 현 총리는 그 법을 고쳐야 한다며 국민을 더 크게 부추기고 있는 중이다.
역사를 바로 알고 지키라며 박근혜가 아베에게 조언을 하고 있다. 아베도 당신도 크게 다를 게 없다며 받아치고 있는 중이다.
가까이 있는 국가와 우리는 더 멀어져야만 하는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거 대 동아전쟁에서 우리 여인들이 일본 군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것이 분명한데 일본은 지난 박정희 정권에 그 대가를 다 치렀다며 더 이상 거들떠보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국가와 국가 간에 형성된 것이지 당사자들에게 하지는 않았다. 일본이.
왜? 일본은 그 당사자들에게 그 대가를 따로 지불해야 하는가 하면, 일본이 그 당시 정치를 직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베 정권은 그 책임을 대한민국 정부에도 없지 않다고 과거를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어느 한 쪽도 수그러 들 상황은 아니라는 언론보도를 보면서 아베의 입지를 알만해서다.
그 대가를 치르겠다면 일본 국민들도 아베로부터 멀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 선조들의 잘 못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실 아닌가? 독일은 벌써 두 수상들이 유대인 학살과 세계대전 피해에 대해 깊이 머리를 숙이고 있다. 그러나 잘 영글지 못한 일본의 머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빳빳하지 않는가? 과거 위안부 문제를 빨리 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될 날들이 자꾸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왜? 일본은 결국 세계 여론에 머리를 숙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베가 아니고 그 뒤를 잇는 수상들이 될 것으로 예측하게 한다.
한국도 일본과 외교마찰을 더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박근혜와 아베는 물과 기름이니 쉽지는 않아 보인다. 일본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이 문제 아닌가! 아마도 큰 시련을 겪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방법은 없다. 일본 국민이 아베를 선택한 것과 우리가 우리 본래의 뜻대로 선택한 대통령이 아니기에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아베가 말한 것 같이 위안부문제와 정치는 별개로 하고 서로 협상을 할 수도 없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벌써 버스는 지나가버리고 말았으니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싶다. 불통은 여기서도 벽에 부딪히고 있지 않는가?
아베가 외조부 기시노부스케의 위력을 물려 받은 것 같이 박근혜도 박정희의 힘을 뒤에 두고 있는데 뒷심을 받쳐주는 이들이 모두 일본의 전쟁과 결부한 힘 아닌가? 아베는 군 위안부 문제를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의 위안부 약속은 남달랐으니 물과 기름의 역할에 따라 달라 질 것 같아보이나 크게 변하지 못할 것 같아 아쉬움이 더 크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한국 정부가 한일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군위안부 문제 해결의 진전된 조치나 구상을 밝히지 않은 채 "(군위안부 문제가) 정치, 외교문제가 되는 것은 안타깝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오후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총리관저에서 새누리당 서청원 의원을 비롯한 한일의원연맹 소속 한국 의원들을 28분간 면담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서 의원이 전했다.
이에 대해 서 의원은 "한일관계에 중요한 것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며,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이라고 강조했다. 또 군위안부 피해자들 평균 연령이 88.5세이고, 55명만 생존한 상황이라고 소개한 뒤 "아베 총리가 이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아베 총리에게) 전했다"고 밝혔다.
서 의원은 또 "금년이 한일수교 50주년이 되기 때문에 양국이 새 출발을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구두 메시지를 아베 총리에게 전했다.(연합뉴스;2015.1.15.)
1948년 12월23일 일본의 전쟁 광신자 도조 히데키와 A급 전범 7인이 이 세상에서 더는 발로 서게 할 수 없게 처형되고 난 다음날, 지금 제96대 아베 신조 일본 내각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날이다. 왜 그는 A급 전범에서 풀려났을까? 물론 전쟁을 일으키자는 광신자와는 좀 거리가 있었다는 것은 알만하다. 하지만 그도 일본의 괴뢰국이라 불러지는 만주국에서 1936년부터 4년 동안 젊음을 불태운 위인 아닌가? 아마도 그 당시 상황을 연합군 측에서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기시 노부스케는 도쿄 제국대를 나와 농상무성에서 입신이 시작된다. 그리고 총무처 차장의 위치에서 만주국으로 넘아갔다. 그의 두뇌는 새롭게 불타면서 일본을 위해 새로운 청사진을 제출했다. '산업 5개년 개발 계획'을 제출하면서 만주를 일본 괴뢰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획기적인 기획안이다. 일본군 엘리트와 관료 그리고 재계 지도자들을 위해 새로운 사회를 기획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사고와 제국주의적 실행이 섞어갈 수 있게 말이다. 중앙통제형을 바탕으로 개발독재 체제가 들어선 것이다. 계획 경제를 이루기 위해 농촌개혁을 해야 했고 중화학공업육성과 함께 수출을 주도해냈다.
고로 기시 노부스케는 중국인들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TV조선은 2014년1월22일자에 '아베 총리 외조부 기시노부스케 난징 대학살 깊이 관여'라는 제하에 중국 랴오닝 성 문서기록관에서 제출한 학살 사건 내용이 실려 있었다.
1937년 12월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할 당시만 해도 106만의 시민이 1938년 1월 제1차보고서에는 인구가 20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며 한달 새 어떤 달은 수만 명의 인명이 죽어간 것으로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당시 기시 노부스케가 현역 군인은 아니었으니 사살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생명의 주검들을 대량으로 실어나르며 일본의 강행에 동참했다는 증거가 있는 것이다.
4년의 만주국 상황을 마치고 일본으로 다시 귀국한 기시 노부스케는 이듬해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으로 성큼 올라선 것만 봐도 그의 행보는 남달랐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후 전쟁과 아주 관련이 많은 군수성 차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단지 이 때 전쟁을 더 할 수 없는 경제적 상황에 닿아 도조 히데키 총리에 맞선 적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결국 일본의 패망은 경제난이 가져온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 문제를 연합군 측에서 참고하여 기시 노부스케를 A급 전범에서 빼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간다. 기시 노부스케는 1957년 부터 1960년까지 제56대와 57대 일본 내각총리를 했다. 1960년 1월 19일 미국의 워싱턴 D.C.에서 체결된 미일 상호협력 및 안전보장 조약(일명 쇼와 35년 조약 6호, 또는 미일 안전보장조약)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 조약이 성사되고 미국 군인들은 일본 영토 안에서 시설 및 구역에 대한 미군 지역이 설치되고 그 안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 미군 기지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안 군중들은 들고 일어났다. 대규모 군중시위 등 사회 혼란에 책임을 지고 기시 노부스케는 정계에서 물러나 사회인이 된다. 그러나 그가 총리 재임 시절 꿈꾸던 것이 있었다.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일본 국민 고유의 '평화헌법'이 잘 못 됐다는 것이다. 그 발언으로 국민의 노여움을 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본 인들은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본다. 물론 그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으나 고치라는 쪽도 대단하게 넓게 퍼져가고 있다. 아베 신조 현 총리는 그 법을 고쳐야 한다며 국민을 더 크게 부추기고 있는 중이다.
역사를 바로 알고 지키라며 박근혜가 아베에게 조언을 하고 있다. 아베도 당신도 크게 다를 게 없다며 받아치고 있는 중이다.
가까이 있는 국가와 우리는 더 멀어져야만 하는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거 대 동아전쟁에서 우리 여인들이 일본 군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것이 분명한데 일본은 지난 박정희 정권에 그 대가를 다 치렀다며 더 이상 거들떠보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국가와 국가 간에 형성된 것이지 당사자들에게 하지는 않았다. 일본이.
왜? 일본은 그 당사자들에게 그 대가를 따로 지불해야 하는가 하면, 일본이 그 당시 정치를 직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베 정권은 그 책임을 대한민국 정부에도 없지 않다고 과거를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어느 한 쪽도 수그러 들 상황은 아니라는 언론보도를 보면서 아베의 입지를 알만해서다.
그 대가를 치르겠다면 일본 국민들도 아베로부터 멀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 선조들의 잘 못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실 아닌가? 독일은 벌써 두 수상들이 유대인 학살과 세계대전 피해에 대해 깊이 머리를 숙이고 있다. 그러나 잘 영글지 못한 일본의 머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빳빳하지 않는가? 과거 위안부 문제를 빨리 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될 날들이 자꾸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왜? 일본은 결국 세계 여론에 머리를 숙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베가 아니고 그 뒤를 잇는 수상들이 될 것으로 예측하게 한다.
한국도 일본과 외교마찰을 더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박근혜와 아베는 물과 기름이니 쉽지는 않아 보인다. 일본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이 문제 아닌가! 아마도 큰 시련을 겪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방법은 없다. 일본 국민이 아베를 선택한 것과 우리가 우리 본래의 뜻대로 선택한 대통령이 아니기에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아베가 말한 것 같이 위안부문제와 정치는 별개로 하고 서로 협상을 할 수도 없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벌써 버스는 지나가버리고 말았으니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싶다. 불통은 여기서도 벽에 부딪히고 있지 않는가?
아베가 외조부 기시노부스케의 위력을 물려 받은 것 같이 박근혜도 박정희의 힘을 뒤에 두고 있는데 뒷심을 받쳐주는 이들이 모두 일본의 전쟁과 결부한 힘 아닌가? 아베는 군 위안부 문제를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의 위안부 약속은 남달랐으니 물과 기름의 역할에 따라 달라 질 것 같아보이나 크게 변하지 못할 것 같아 아쉬움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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