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분열된 정치·사회에 실망, 통합·치유 ‘리더십’ 열망… 관객 스크린으로 끌어들여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이 역대 최단 기간인 개봉 12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명량>은 개봉 당일 역대 최다인 68만 관객으로 시작해 각종 흥행 기록들을 깨면서 무서운 속도로 관객들을 스크린 앞으로 끌어들였다. 왜 사람들은 <명량>에 이토록 열광하는가.
<명량>의 스토리는 무척 단순하다. 총 128분의 상영시간 중 전반부 60분가량은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고뇌를 다루고 있다. 후반부 61분은 이순신 장군이 탄 배가 주축이 된 해상 전투신으로 채워져 있다. 이 영화를 끌고 가는 가장 큰 힘은 조연들의 화려한 활약이나 스토리의 기발함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정치적 성향이나 취향과 상관없이 한국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존경하는 인물이다. 김한민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우리 사회는 분열과 갈등이 팽배해 있다”며 “이 시기에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구심점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이 통합·치유의 아이콘으로 작용했으면 했다”고 말했다. 배우 최민식은 “지금은 이순신 장군이 있던 시대와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영화를 통해 볼 수 있는 이순신 장군의 정신은 이 시대에도 교훈이 되고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서는 연출을 통해 이순신을 “ ‘민중’ 속의 영웅”으로 다뤘다. 이순신은 병사들과 동떨어진 채로 높은 곳에서 일방적으로 지시를 하지 않았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명량>은 영웅 이순신을 전형적인 영웅 서사에 기대서 풀어내지 않고 영웅이면서도 비영웅적인 면모가 드러나도록 풀어냈다”고 말했다. 전투신에서는 이순신을 거의 클로즈업하지 않는다.
<명량>의 전투신은 총과 포를 이용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방식 대신 관객이 차근차근 따라갈 수 있는 식으로 구성됐다. 한 척의 배가 몇 차례의 공격에 영리하게 대응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모습은 영화의 몰입도를 높였다.
단순 흥행영화가 아닌 1000만 영화로 이순신을 끌고 가게 만든 것은 답답한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참된 리더를 찾고 싶어한 사람들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다. 한국에서 활동 중인 미국인 영화평론가 달시파켓은 지난 5일 자신의 블로그에 <명량>에 대해 글을 올렸다. 그는 “<명량>의 흥행은 <명량>이 가진 오락적인 가치만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부분에서 기인한다”고 썼다. 그는 “2014년에 끔찍하게 암울한 시간을 보내온 한국인들은 존경스러운 지도자를 다룬 승리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최근 세월호 침몰사고를 비롯해 각종 대형사고와 정치권의 분열에 지친 사람들은 분열을 통합하고 사건을 해결해줄 강력한 리더를 원했다는 것이다.(경향신문;2014.8.10)
영화 <명량>의 열기가 이렇게 단 시간에 폭발하고 있는 이유를 경향신문은 박 정권의 일방적인 리더십에 대한 반발로 머리기사를 넣고 있었다.
그보다 국민은 무능했던 선조와 박근혜를 비교하기위해 극장을 찾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역사는 조선왕조 14대 선조를 명민하면서 학문에 조예가 깊은 임금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우유부단하기로 유명하다.
이씨 조선 27명의 왕으로 역사를 마친 조선 왕계에 정통성의 문제가 없는 왕은 그 중 10명 뿐이라고 한다.
나머지 17명의 왕들은 세자책봉과정이든 왕위계승에 있어 원칙에 맞지 않든지 비 정상적인 왕위 계승자들이라는 것이다.
조선 왕조에서 왕의 직계가 아닌 왕실의 방계에서 처음 왕위에 오른 이가 선조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였던 덕흥군의 세째 아들로서 그 누구도 그가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은 제11대 왕 중종의 일곱 번째 아들인데, 더해서 후궁 출신인 창빈 안씨 소생이었으니 더군다나 왕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선조의 이름은 균이었으나 후일 항렬에 따라 연으로 고쳐진다. 그의 봉작은 하성군으로 불러지고 있었다.
왕이 된 이유는 두상이 큰 관상에서 혜택을 본 것이라고도 한다. 머리가 크면 관상으로 볼 때 아래 사람을 잘 거느린다는 학설이 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명종이 34세에 일찍 세상을 하직한 이유가 가장크고,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가 1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하성군은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선조실록, 광해군 일기, 연려실기술)
명종이 갑자기 세상을 하직했기에 당시 중전이던 인순왕후가 권한을 이어받아 하성군을 지목했다고 하니 왕비 또한 하성군을 총애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가 등극하고 조정은 동서 분당이 시작되고 크고 작은 국가 재난이 일어난다,
그 중 가장 큰 사건이 임진왜란이다. 조정은 둘 셋으로 갈라져 있었으나 이조 200년을 태평성대로 이어 왔으니 왕이 국가 방위를 위해 무엇을 알았겠는가. 아들인 관해군보다도 국토방위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광해가 국가 방위에 힘써야 한다고 할 때 선조의 가슴은 시기와 비하로 쩌들고 있었다. 결국 일본의 도요토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조선 땅을 점령하고 만다. 삽시간에 반도는 왜의 말발꿉과 왜군의 개다발 아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중국 쪽으로 밀려 올라가야 했다. 한양은 물론 개경 평양으로 밀려나 결국은 의주까지 몽진을 간 선조 중국으로 도망갈 궁리에 여념이 없었으니 말해 무었하랴?
이때까지 이순신 장군을 옥사에 넣어두고 비아냥 거렸던 조선의 정치인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통제사 원균이 이끌던 수군이 거제해역에서 참패를 하면서 이순신이 마련해 놓았던 수군까지 모두 다 붕괴시키고 말았으니 어찌 한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감옥에서 나온 이순신 백의 종군하여 다시 수군의 전열을 가다듬는다.
그가 재등용해서 첫 승전보를 울인 대첩을 이름하여 <명량대첩>이라 한다.
이로서 왜군의 타격은 대단했으니, 국민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국가와 국민을 버리고 저 살길 찾아 북으로 북으로 도망이나 가던 왕과 다르게 이순신은 자신의 몸을 던져 남녘의 바다를 지켰으며 결국 국가 재건에 이바지 시킨 인물 아닌가?
현대와 그 당시와 차이는 분명 있다. 하지만 국민의 심정은 그 당시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는가!
무능력의 선조가 국가를 내던지고 중국에 의존하려던 그 당시와 무능력 무책임한 박근혜 정권에서 회의를 느끼고 있던 국민의 열망은 무엇인가?
새로운 지도자를 갈말하는 것 아닌가?
영화 명량이 지금 국민을 위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국민의 열망은 위로만 가지고 될 일인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 누구에게? 새로운 지도자로부터다.
대통령이 관람한 명량은 어떤 명량이었을까?
자그마치 12일 동안 국민의 5분의 1이 이 영화를 보았다고 한다. 참으로 빠른 속도로 국민의 가슴을 파고드는 그 영화가 미국에도 곧 상륙할 것이라는 뉴스다. 외국인들도 감상을 하고나서 좋은 호감을 갖는다니 많은 이들이 기대를 할 것으로 미룬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이 역대 최단 기간인 개봉 12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명량>은 개봉 당일 역대 최다인 68만 관객으로 시작해 각종 흥행 기록들을 깨면서 무서운 속도로 관객들을 스크린 앞으로 끌어들였다. 왜 사람들은 <명량>에 이토록 열광하는가.
<명량>의 스토리는 무척 단순하다. 총 128분의 상영시간 중 전반부 60분가량은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고뇌를 다루고 있다. 후반부 61분은 이순신 장군이 탄 배가 주축이 된 해상 전투신으로 채워져 있다. 이 영화를 끌고 가는 가장 큰 힘은 조연들의 화려한 활약이나 스토리의 기발함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정치적 성향이나 취향과 상관없이 한국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존경하는 인물이다. 김한민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우리 사회는 분열과 갈등이 팽배해 있다”며 “이 시기에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구심점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이 통합·치유의 아이콘으로 작용했으면 했다”고 말했다. 배우 최민식은 “지금은 이순신 장군이 있던 시대와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영화를 통해 볼 수 있는 이순신 장군의 정신은 이 시대에도 교훈이 되고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서는 연출을 통해 이순신을 “ ‘민중’ 속의 영웅”으로 다뤘다. 이순신은 병사들과 동떨어진 채로 높은 곳에서 일방적으로 지시를 하지 않았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명량>은 영웅 이순신을 전형적인 영웅 서사에 기대서 풀어내지 않고 영웅이면서도 비영웅적인 면모가 드러나도록 풀어냈다”고 말했다. 전투신에서는 이순신을 거의 클로즈업하지 않는다.
<명량>의 전투신은 총과 포를 이용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방식 대신 관객이 차근차근 따라갈 수 있는 식으로 구성됐다. 한 척의 배가 몇 차례의 공격에 영리하게 대응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모습은 영화의 몰입도를 높였다.
단순 흥행영화가 아닌 1000만 영화로 이순신을 끌고 가게 만든 것은 답답한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참된 리더를 찾고 싶어한 사람들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다. 한국에서 활동 중인 미국인 영화평론가 달시파켓은 지난 5일 자신의 블로그에 <명량>에 대해 글을 올렸다. 그는 “<명량>의 흥행은 <명량>이 가진 오락적인 가치만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부분에서 기인한다”고 썼다. 그는 “2014년에 끔찍하게 암울한 시간을 보내온 한국인들은 존경스러운 지도자를 다룬 승리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최근 세월호 침몰사고를 비롯해 각종 대형사고와 정치권의 분열에 지친 사람들은 분열을 통합하고 사건을 해결해줄 강력한 리더를 원했다는 것이다.(경향신문;2014.8.10)
영화 <명량>의 열기가 이렇게 단 시간에 폭발하고 있는 이유를 경향신문은 박 정권의 일방적인 리더십에 대한 반발로 머리기사를 넣고 있었다.
그보다 국민은 무능했던 선조와 박근혜를 비교하기위해 극장을 찾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역사는 조선왕조 14대 선조를 명민하면서 학문에 조예가 깊은 임금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우유부단하기로 유명하다.
이씨 조선 27명의 왕으로 역사를 마친 조선 왕계에 정통성의 문제가 없는 왕은 그 중 10명 뿐이라고 한다.
나머지 17명의 왕들은 세자책봉과정이든 왕위계승에 있어 원칙에 맞지 않든지 비 정상적인 왕위 계승자들이라는 것이다.
조선 왕조에서 왕의 직계가 아닌 왕실의 방계에서 처음 왕위에 오른 이가 선조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였던 덕흥군의 세째 아들로서 그 누구도 그가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은 제11대 왕 중종의 일곱 번째 아들인데, 더해서 후궁 출신인 창빈 안씨 소생이었으니 더군다나 왕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선조의 이름은 균이었으나 후일 항렬에 따라 연으로 고쳐진다. 그의 봉작은 하성군으로 불러지고 있었다.
왕이 된 이유는 두상이 큰 관상에서 혜택을 본 것이라고도 한다. 머리가 크면 관상으로 볼 때 아래 사람을 잘 거느린다는 학설이 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명종이 34세에 일찍 세상을 하직한 이유가 가장크고,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가 1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하성군은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선조실록, 광해군 일기, 연려실기술)
명종이 갑자기 세상을 하직했기에 당시 중전이던 인순왕후가 권한을 이어받아 하성군을 지목했다고 하니 왕비 또한 하성군을 총애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가 등극하고 조정은 동서 분당이 시작되고 크고 작은 국가 재난이 일어난다,
그 중 가장 큰 사건이 임진왜란이다. 조정은 둘 셋으로 갈라져 있었으나 이조 200년을 태평성대로 이어 왔으니 왕이 국가 방위를 위해 무엇을 알았겠는가. 아들인 관해군보다도 국토방위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광해가 국가 방위에 힘써야 한다고 할 때 선조의 가슴은 시기와 비하로 쩌들고 있었다. 결국 일본의 도요토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조선 땅을 점령하고 만다. 삽시간에 반도는 왜의 말발꿉과 왜군의 개다발 아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중국 쪽으로 밀려 올라가야 했다. 한양은 물론 개경 평양으로 밀려나 결국은 의주까지 몽진을 간 선조 중국으로 도망갈 궁리에 여념이 없었으니 말해 무었하랴?
이때까지 이순신 장군을 옥사에 넣어두고 비아냥 거렸던 조선의 정치인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통제사 원균이 이끌던 수군이 거제해역에서 참패를 하면서 이순신이 마련해 놓았던 수군까지 모두 다 붕괴시키고 말았으니 어찌 한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감옥에서 나온 이순신 백의 종군하여 다시 수군의 전열을 가다듬는다.
그가 재등용해서 첫 승전보를 울인 대첩을 이름하여 <명량대첩>이라 한다.
이로서 왜군의 타격은 대단했으니, 국민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국가와 국민을 버리고 저 살길 찾아 북으로 북으로 도망이나 가던 왕과 다르게 이순신은 자신의 몸을 던져 남녘의 바다를 지켰으며 결국 국가 재건에 이바지 시킨 인물 아닌가?
현대와 그 당시와 차이는 분명 있다. 하지만 국민의 심정은 그 당시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는가!
무능력의 선조가 국가를 내던지고 중국에 의존하려던 그 당시와 무능력 무책임한 박근혜 정권에서 회의를 느끼고 있던 국민의 열망은 무엇인가?
새로운 지도자를 갈말하는 것 아닌가?
영화 명량이 지금 국민을 위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국민의 열망은 위로만 가지고 될 일인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 누구에게? 새로운 지도자로부터다.
대통령이 관람한 명량은 어떤 명량이었을까?
자그마치 12일 동안 국민의 5분의 1이 이 영화를 보았다고 한다. 참으로 빠른 속도로 국민의 가슴을 파고드는 그 영화가 미국에도 곧 상륙할 것이라는 뉴스다. 외국인들도 감상을 하고나서 좋은 호감을 갖는다니 많은 이들이 기대를 할 것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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