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News)와 생각

안간힘쓰며 이중성격 드러낸 문창극?

삼 보 2014. 6. 20. 00:33

 

    영국의 시인이자 풍자가로 알려진 찰스 처칠(charles churchill)은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그의 작품들도 거의 타락한 내용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말 한 “천재에게 조국이란 없다(Genius is of no country)”는 말이 명언으로 돌아가고 있다 한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지명 10일 만에 자신이 힘겹게 썼던 과거 안중근 의사에 대한 글을 최초로 발견한 것 같다. 그리고 그는 19일 오후 퇴근하면서 기자들에게 그 글을 읽어가면서 자신은 친일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뉴시스의 글을 먼저보기로 한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19일 자신의 역사관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왜 나보고 친일이라고 하고 반민족적이라고 하는지 정말로 가슴이 아프다"고 항변했다.

 

문 후보자는 이날 오후 6시께 서울 창성동 정부서울청사 별관 사무실에서 퇴근하는 길에 취재진 앞에서 "앞으로 출퇴근길에 청문회 준비를 하면서 느낀 소감을 한 가지씩 말씀드리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문 후보자는 자신이 과거에 쓴 칼럼과 강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약 20분가량 격앙된 어조로 역사관 논란에 대해 해명했다.

 

문 후보자는 "나는 식민사관이라는 게 뭔지 뚜렷하게 모른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라며 "그러나 나는 나라를 사랑하셨던 분을 가슴이 시려오도록 닮고 싶다. 내가 가장 현대 인물사 가운데 제일 존경하는 분은 안중근 의사님과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서류 가방에서 자신이 과거에 안중근 의사에 대해 쓴 '코레아 우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꺼내 읽어 내려갔다.

 

이 글은 2009년 안중근 의사 유적지를 돌아보고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너무 그를 몰랐고 그를 잊고 살았던 내가 부끄러웠다"며 쓴 칼럼이다.

 

그는 이 칼럼에서 "그렇게 원하시던 국권은 회복되고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나라가 됐습니다. 천국에서 승리의 만세를 부르실 당신을 그려봅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당신의 시신도 찾지 못하고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병사의 시신조차도 끝까지 찾기 위해 애쓰는 나라들을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고 적었다.

 

 

또 "왼손 무명지를 잘라 그 피로 '대한독립'을 썼던 당신은 글씨마다 '대한국인 안중근'과 함께 무명지 없는 왼손으로 낙관 대신 찍었습니다. 당신의 간절한 소망은 대한국인, 즉 대한의 국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당신이 그렇게도 원했던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이 국민 됨을 모두가 소중히 여기며 살겠습니다"라고 밝혔다.

 

문 후보자는 칼럼을 다 읽은 뒤 "나는 감히 말씀드린다. 그럴 자격은 없지만 안중근 의사님과 같은, 또 소년 다윗과 같은 그런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말했다.(뉴시스;2014.6.19)

 

 

   그의 글 내용대로라면 그는 2009년 안중근 의사 유적지를 돌아보고 나서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너무 그를 몰랐고 그를 잊고 살았던 내가 부끄러웠다"했으니 그의 출생년도(1948.10.)로부터 계산한다면 61년 만에 안 의사의 고뇌를 알았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안 의사에 대한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다 늙어 갈 때까지 조국을 위해 헌신한 분을 잊고 살다 겨우 61세가 되어서야 실눈을 뜨고 안 의사를 본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문 후보자는 '왜 청문회에 가려고 하는지'와 '정치권에 서운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등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는 응답을 하지 않고 준비된 차량에 올라 청사를 떠나고 말았다는 뉴스에 의문이 남는다.

   그는 명문 서울고를 나오고 서울대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박사학위도 받았다. 그런대로 우수한 두뇌를 갖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온누리교회에서 한 말 들이 거짓임이 드러나고 있다.

   다음은 ‘문창극은 왜 '달레 신부'를 왜곡 인용했을까?’라는 제하의 노컷뉴스를 본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온누리교회 강연을 들어보자.

 

"1874년에 달레 신부라는 분이 왔습니다.

이 분이 한국에 와서 한국을 보고나서 '코리아의 교회 역사'를 썼습니다.

거기에 쓴 1874년의 조선 상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창고에 저장은 장부 상에만 있다.

지방 병기고에는 쓸만한 탄약도 무기도 없다.

관리들이 다 팔아먹고 누더기 몇 조각과 고철 나부랭이를 대신 갖다 놨다.

아전과 수령은 그들 마음에만 드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강탈한다.

백성은 하도 곤궁하여 서해안 사람은 밀수업자에게 어린 딸을 쌀 한 말에 팔고 있다.

길마다 송장이 널려 있다'

이것이 1874년 달레 신부가 본 한국의 현상입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달레 신부는 조선 땅을 밟은 적이 없다.

 

1874년에 달레 신부는 조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교회사>라는 기념비적인 저서를 빠리에서 발간했다.

 

그는 빠리의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 선교 활동보다는 문필가로 유명했다.

 

달레 신부는 1877년 아시아 지역 선교를 위해 일본과 만주를 방문한 적은 있지만, 조선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문창극의 강연은 기본 사실부터 잘못된 것이다.(노컷뉴스;2014.6.19.)

 

19세기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던 프랑스 신부들 (노컷뉴스에서)

 

 

  다음은 노컷뉴스의 원문을 보실수 있음

http://www.nocutnews.co.kr/news/4044423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보도에서 보면 거의 온전한 반민족적 언행을 했음이 드러나고 있음을 본다.

이조 양반사회의 진부한 시절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병폐가 지금까지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이해해야 하기에 더욱 벅찬 현실이다.

   그러나 조선의 여인들은 백의를 즐겨 입고 그 깨끗함을 지키기 위해 부지런히 살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문창극은 윤치호를 신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영국의 지리학자인 비숍 여사의 글을 인용했다고 이중 적인 사실을 밝히고 있다.

   거기에 19일에는 자기가 쓴 수많은 글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반감을 접고 최초로 안 의사를 이해했다는 글을 내보이면서 당당함을 주장하고 있다.

 

   문창극은 두뇌는 좋은지 몰라도 그의 국가관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그는 그 좋은 머리를 이용해서 찰스처칠이 말한 “천재에게 조국이란 없다”는 사상 속에서 살아왔는지 모를 일이다.

 

 

  참고가 된 원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6191827191&code=910100&nv=stand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40619_0012994252&cID=10301&pID=10300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346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43261.html?_ns=c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