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창을 열다

이화여대 시위와 김활란의 수치?

삼 보 2016. 8. 4. 04:46

    

     인구가 많아서 일까? 세상이 거칠어진 때문일까? 사회 인심을 믿지 못해서일까? 그도 아니면 윗물이 맑지 못해서 일까? 세상은 온통 자기 이기심에 차있는 것 같다. 옆 사람도 이젠 아랑곳 하지 않고 제 뜻에 맞지 않으면 모조리 적이라고 한다. 심지어 가족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누구를 믿을 것인가? 참으로 힘든 현실이다.


    이화여자대학교(이화여대)에서 시위가 시작한 것은 지난달 28일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나간다. 학생들이 이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왜 농성을 하고 있는 것인가? 자기 밥그릇 밥이 오물로 변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미리 손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린 시절부터 머리를 감싸고 공부를 했던 그 과거를 생각하면서 울분을 토하는 것은 아닐까? 이화여대 학생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라도, 그 학생들 이전부터 한국의 교육열은 남달라서, 초등학교시절부터 우리는 과외를 시키지 않으면, 학원으로 아이들을 보내 고된 학습을 시키고 사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살지 않았을까? 고로 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머리를 싸매고 살지 않으면, 세상살이를 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을 하며 사는지 모를 것처럼 고된 공부를 하며 대학교에 들어간다. 그것도 서울에 본교를 둔 대학을 들어가는 학생들은 스스로를 남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힘들게 대학교에 들어간 학생이라는 것은 틀리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런 학생들과 섞이게 하려는 교육부의 정책이 잘 못된 것 같다.


    평생교육 단과대학이란 제도를 교육부에서 창안한 것이 문제였나? 이화여대는 미래라이프대학(미라대)으로 명명하여 2년제 대학을 설립할 것으로 가닥을 잡았고, 28일에 본관 소회의실에서 대학 평의원회를 열기로 했으나 학생들의 점거로 무산된 것이라고 한다. 그로 인해 평의원과 직원이 건물에 가쳐 있었다고 학교 측은 언급한다. 결국 30일 서대문경찰서는 1600여 명의 경찰이 동원돼 학생들을 제치고 들어가는 소동을 일으킨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로부터 재학생들과 졸업생까지 가담하여 졸업장(복사본) 반납 소동도 벌어진 것이다. 3일 오후 최경희(1962~) 총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미라대 설립 철회 결정을 발표했다. 최 총장은 3일 평생교육 단과대학 사업 철회 방침을 밝히면서 “저희 일이 이렇게 사회적 문제로 비화하게 된 것이 너무나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겠다”며 “학교의 발전 과정에서 있는 일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를 바란다.”고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재학생과 졸업생 수천여 명이 이날 오후 모여 최경희 총장 사퇴와 교육부 철회까지 외치고 있단다. 이유는 총장의 신뢰에 금이 가고, 학교 명예실추이다.


    이번 농성의 원인은 교육부가 30억 원을 지원, 평생교육 단과대학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구성원들과 소통 없이 일방적인 추진을 하면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5월 교육부가 이 사업 추가 신청 공고를 내자, 이대측은 계획서를 제출했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딴 것이라 한다.

소통이란 참으로 중요하다. 내 속으로만 감추고 있다 갑자기 발표하면 상대는 멈칫거리게 마련인 것이다. 더구나 피 땀 흘려 입학한 학교인데, 진학 시험도 걸치지 않고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같은 구내에 설립된다는 것이 얼마나 떫었을 것인가! 겉으로는 직장인들을 구제 하는 것 같이 발표를 하고, 내막에 있어서는 다른 주머니를 찬다면 말이다. 울분을 터트릴 곳이 없던 재학생들은 친일을 한 김활란 동상에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페인트와 낙서 달걀까지 던져 초대 총장 동상에 자신들의 마음풀이를 한 것 아닌가?


    감활란(金活蘭).

    세례명 헬렌에서 ‘살아있는 난초’라는 뜻을 머금게 한 이름으로 바꾼 김기득(金己得)의 호는 우월(又月)이었다. 어린 시절 3·1독립운동 때까지만 해도 친일을 할 생각이 있었을 것인가? 그러나 그녀는 일본의 강요에 넘어가고 말았다. 목숨을 걸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 아닌가? 생각해본다.

    두산백과는 “1937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친일단체인 방송선전협의회·조선부인연구회·애국금차회 등에 참가하였고, 1941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및 참사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내선(內鮮) 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1939.3),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1942.12), 〈남자에 지지 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등의 글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는 한편, 〈여성의 무장〉(1941.12), 〈대동아 건설과 우리 준비〉(1942.2) 따위의 주제로 친일 강연을 했다.”적고 있다.


    이화여대의 김활란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 1938년 총독부의 종용 하에 동아일보 김성수, 조선일보 방응모, 두산그룹 박승직 등이 결성한 전시동원 선전조직으로 1939년에 공표된 국민징용령에 맞춰, 조선인 강제징용과 위안부 모집 등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해방이 돼 1961년까지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장 겸 이화여대 초대총장을 했다. 1950년 국가 공보처장(公報處長)도 했다. 이승만을 아주 잘 따랐으니 말이다.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 이사장도 했고,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한국여학사협회 회장 등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고, 국제연합(UN)총회 한국대표를 비롯하여 전후 수십 차례 국제회의도 참석했다. 1963년 필리핀 대통령 막사이사이 상(賞) 공익 부문상도 받았고, 미국 감리교에서 수여하는 다락방상을 수상하며, 한국 외교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1970년 1등 수교훈장도 추서됐다. 하지만 역사는 더 이상 그녀를 올바른 인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21세기에 들어와 이화여대 학생들은 그녀를 수치의 여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상을 철거하지 않으면 치욕은 더 심해 질 것으로 본다. 역사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역사를 왜곡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 때는 역사가 왜곡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화의 여성들은 지금 김기득(활란의 본명)의 상을 어쩔 수 없어 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최경희 이화여자대학 총장이 3일 학교 본관 농성 현장을 찾아 평생교육 단과대인

‘미래 라이프대학’ 설립 철회 결정을 발표하고 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참고가 된 원문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60802000409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803500227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5437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3394&cid=40942&categoryId=33385

http://news.joins.com/article/203977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