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창을 열다

테러에 떠는 세계와 감정 세계?

삼 보 2016. 7. 25. 05:31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인간은 정치를 알아야 하며, 그 정치 속에서 살고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고 - 정치에 대한 철학적 성찰, 정치적 개연성 속에서 빚어낸 제도적 구상,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정치사회적 조건에 대한 해법 - 에서 한 말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고 한 말에서 파생되는 말들이 적잖은 것 같다. 그 중 누가 그 말을 언급했을 지는 확실치 않지만 “인간은 감정(感情)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감정만 앞세워서는 세상살이가 평탄치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또 인간의 감정의 범위는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닌 듯싶다. 그러나 모든 사건과 사고들은 인간들이 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일어나는 것으로 안다.


    뮌헨의 도심 쇼핑몰에서 22일(현지시간) 총기 난사로 10대 7명 등 9명이 숨지고 27명의 부상자를 낸 사건도 알리 존볼리(18)의 사회적인 왕따의 보복의 한 단면이다. 최근 9일 동안 프랑스 니스 해변에서 트럭 테러(14일)와 독일 통근열차 도끼 테러(18일) 등 대형 테러가 잇따라 일어난 것에 유럽만이 아닌 세계가 충격에 휩싸이고 있다. 그 모든 사건들에 대한 원인은 결국 인간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일어난 사건이다.


     ‘감정(feeling 感情)’이란 무엇인가? 두산백과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에는 심리학에서 감각과 감정을 구별하지 않았으나, J.워드와 W.분트는 감각은 객관적이며, 감정은 주관적인 것이라 구별하였다. 감정은 인식작용이나 충동의지와 다른 것이지만 엄밀히 구분할 수는 없다. 감정과 의지가 하나가 된 정의(情意)를 독일어에서는 ‘Gemüt(心情)’라 하고, 감정과 지각(知覺)이 합쳐진 상모적 지각(相貌的知覺)이라는 현상도 있다. 따라서 최근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지(知) ·정(情) ·의(意)로 의식(意識)을 구분하는 견해는 부정되고 있다.


   감정의 발생원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생리적·신체적 원인: 어떤 감정은 신체에서 그 원인이 수반된다. 가령, 몸을 의지할 곳이 갑자기 없어지면 공포심이 일어나고, 몸을 짓눌러 자유를 빼앗기면 노여움이 일며, 몸의 어떤 부분을 자극하면 쾌감이 생기고, 겨드랑이나 발바닥을 간지르면 웃음이 나오며, 몸을 세게 치면 고통의 감정이 발생한다. W.제임스와 C.랑게는 감정을 신체적 변화의 느낌이라 보고, 유명한 ‘제임스 랑게설(說)’을 주장하였다.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우니까 슬픈 것이고, 무서워서 떠는 것이 아니라 떠니까 무서워지며, 우스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우스워진다는 학설이다. 이 설에도 일면의 진리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② 심리적 원인: 감정은 요구수준과의 관계로 생긴다. 즉, 성적이 요구수준에 도달하면 성공감, 도달하지 못하면 실패감이 생긴다. 이는 쾌 ·불쾌, 행복감과 불행감이 주된 감정이다. 또 성적이 요구수준에 도달할 듯 하면서 잘 도달하지 못할 경우에는, 초조해지고 노여운 감정을 경험한다. 요구수준과 성적이 동떨어져 있으면 놀람 ·이상함 등의 감정이 생긴다.


   ③ 사회적 원인: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로 요구수준과 성적의 문제가 얽히게 되면 여러 가지 감정이 발생한다. 승리와 패배의 감정, 당해 낼 수 없는 상대를 대할 때의 열등감과 이와 반대 경우의 우월감이 존재한다. 또 자존심이 상했을 때의 노여움, 사람끼리의 호불호(好不好), 애증도 생긴다.


   ④ 문화적 원인:가장 고상한 가치감정인 정조(情操)는 문화적 원인으로 생긴다. 도덕적 정조로는 정의감 ·결벽감이 있으며,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의 분노도 있다. 예술적 정조로는 황금분할,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 등의 반복미, 시메트리(symmetry)와 아시메트리(asymmetry)의 느낌, 밸런스, 프러포션 등의 감정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문화의 형(型)에 의한 것이지 보편타당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과학적 정조로서는 진리에 대한 놀람과 신비감이 있으며, 정당할 때에는 기분이 좋지만 허위에 대해서는 불쾌감이 생긴다. 종교적 정조로는 신성한 느낌, 외경의 감정, 의거(依據)와 안심감, 불교적인 무상감(無常感), 감사의 감정, 신비감 등이 있다.


   감정은 여러 입장에서 분류할 수 있다.

   ① 희로애락(喜怒哀樂)처럼 격렬하고 강하지만 폭발적으로 표현되어 오래 지속되지 않는 감정을 '정서(情緖)' 또는 '정동(情動)'이라고 한다. 타오르는 듯한 애정, 강렬한 증오 등도 이에 속한다. 이에 비해서 약하기는 하지만 표현이 억제되어 비교적 오래 지속되는 감정을 '정취(情趣)'라고 한다. 공포는 정서이며, 걱정과 불안은 정취이다. 격노(激怒)는 정서이지만, 상대방에 대한 불유쾌한 생각은 정취이다. 홍소(哄笑)는 정서이고 미소는 정취이다. 그 밖에도 유머·분함·행복·비애·외경(畏敬) 등과 같이 가치의식이 가해진 안정적이고 영속적인 감정이 있는데, 이를 '정조(情操)'라 한다. 이는 가치감정이기 때문에, 그 가치에 따라 도덕적·종교적·예술적·과학적 정조로 나눌 수 있다.


   ② W.분트는 쾌(快)·불쾌, 흥분·침정(沈靜), 긴장·이완 등 감정의 3방향설을 주장하였고, P.자네도 기쁨과 슬픔, 노력과 피로, 들뜸과 허무감의 3방향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서 J.로이스는 쾌·불쾌와 안정·불안의 2방향설을 내세웠다.


   ③ M.B.브리지스는 갓 태어난 아기의 정서는 처음에는 단순한 흥분에서 출발하여 생후 3개월경에 쾌·불쾌·흥분으로 분화하고, 4개월경에 불쾌는 노여움·혐오·두려움으로 분화하였다가, 1년 만에 질투가 분화해 나오는데, 이처럼 미분화(未分化)의 흥분은 점차 섬세한 감정으로 분화한다고 주장하였다.


   ④ S.프로이트는 사디즘이나 마조히즘 등의 이상심리에서, 사랑과 미움, 복종과 반항, 쾌와 고(苦) 등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양향성(兩向性:ambivalence)이라고 하였다. 양향성은 복잡한 감정의 심리적 일면을 잘 꿰뚫고 있다.


   ⑤ W.분트는 개개의 특수적 감정과 의식에 뚜렷이 떠오르지 않는 자아상태의 감정을 구별하여, 후자를 일반감정이라고 하였다. W.슈테른은 개개의 공포와 일반적인 불안을 구별하였으며, M.하이데거는 전자를 존재적(存在的:ontisch), 후자를 존재론적(存在論的:ontologisch)이라고 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감정 [feeling, 感情] (두산백과)


    특히 사회적 원인에서 볼 때 승리와 패배의 감정, 당해 낼 수 없는 상대를 대할 때의 열등감과 이와 반대 경우의 우월감이 존재한다. 또 자존심이 상했을 때의 노여움, 사람끼리의 호불호(好不好), 애증 등에서 격한 감정을 짓누르지 못하고 폭발할 때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것 아닌가?

    IS(이슬람 극단주의) 테러가 발생하는 것조차 유럽의 모든 국가는 노출된 상태이다. 그래도 그들의 침투를 사전 예방하는 것이 없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회적 분노의 왕따들은 예방조차 쉬울 수 없을 것이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테러와 집단 총기난사는 세계경제까지 더 저하시키고 있다. 집단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사고를 조성하게 하면 소비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럽 경제가 이 이상 더 침체되면 결국 세계 경제는 일어설 기미를 잃고 말 것이 빤하다. 지금 유럽은 테러의 일상화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처해있다. 어떻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유럽연합 지도자들의 각성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본다. 고로 세계는 이제부터 불황의 늪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 까?


    사회를 튼튼하게 할 수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감정만 앞세운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유럽 지도자들과 선진국 지도자들 모두 감정에 사로잡혀 있으니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테러가 일어난 이후 단 한 명의 지도자도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다독이려고 한 이가 없다. 테러분자들에 강력 대항하겠다는 의지를 전달하면서 국민들로부터 환호를 받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일종 정치 쇼에 만족하는 사회로 유지된다면 어느 사회든 더욱 혼란과 방종의 질서에 묻혀가게 될 것이다. 저변의 극단주의자들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 무차별 살상하는 것을 사회는 분명 분노하게 된다. 하지만 그 원인 병증을 다룰 수 없다면 어떻게 병든 사회가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 없다. 그 고통은 누가 짊어지고 갈 것인가? 각국의 국민들이다. 상위 1%p에 해당하는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이 결코 그 무거운 짐은 지고 가지 않는다. 단지 말로만 애처로워하는 척하면 될 뿐 그 정치인에게 입는 피해는 전혀 없다. 그 중 국가를 진실로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가슴 아파 할 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병든 사회를 위해 깊이 느끼지 않는 이가 어떻게 가슴 아파한다는 말인가?


    영혼과 육신만 갖는 다는 그리스도교 인들은 감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 감정을 인정하는 교인이라면 억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사회가 이렇게 혼탁하게 되는 것은 그 놈의 감정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힘이 있는 이가 그 감정을 버려야 할 일이다. 그런데 유럽과 서구 모든 지도자들은 그 감정을 테러집단의 테러리스트보다 더 강하게 앞세우면서 국민을 선동하고 있잖은가? 어떻게 상위 1%p에 들어가는 이들이 인간 최하위의 극단주의자들과 같아야 한다는 것인가?


    노자(老子)께서는 왕을 하늘과 같이 인정해야 한다고 표현했다. 즉 왕은 하늘과 땅이 지정해 주는 인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세상에 왕들의 권한이 있는 나라는 극소수이지만 대통령이나 수상이 그 국가를 책임진다면 그들도 왕권시대의 동등한 입장과 크게 다를 것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 세계는 그럴만한 책임을 질 최고지도자들은 없는 것 같다. 국가 헌법이 표시하는 대로 그들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생각해서인지 그저 저변의 극단주의자와 같은 사고 속에서 보복을 하자며 국민을 선동하면서 사회를 온통 진흙탕으로 변하게 하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최고 책임자와 지도자는 저변(底邊)의 인물들과 어딘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다른 게 거의 없이 ‘감정의 동물’ 짓을 그대로 따라하며, 국민으로부터 표와 인정만을 받으려는 욕심만 가득하니, 사회가 어찌 썩고 병들지 않을 것인가? 제발 모든 나라 국민들은 감정의 동물에서 탈피하는 국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출처; 세계일보


  참고가 된 원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66161&cid=51609&categoryId=5160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22&aid=0003079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