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상 사

한 쿠바 첫 외교장관 회담과 쿠바

삼 보 2016. 6. 7. 04:42


      쿠바(Cuba)라는 나라를 거론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미·소 간에 1962년 가을에 있었던 ‘쿠바사태’를 먼저 거론하고 싶고, 다음이 북한과 같은 동토(凍土)의 땅이라고 알려진 것이 내 기억의 전부다.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당시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우리들은 아침마다 화제로 올리곤 했을 때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10월 22일 소련제 무기들이 쿠바로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기위해, 함정 183척, 군용기 1,190대로 봉쇄하면서, 전 세계를 일촉즉발의 핵정쟁공포로 몰아넣으면서 쿠바를 물속으로 잠재워버리겠다고 강력히 언급하면서 대치하던 1주간의 사태가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소련 수상 흐루쇼프도 미국의 중국에 대한 한국 위치 같은 역할을 위해, 쿠바를 소련 미사일기지로 마땅한 자리로 잡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쿠바의 미국에 대한 위치가 미국 플로리다 주 바로 아래에 처해 있어, 미국 본토를 향한 소련의 미사일기지는 그야말로 미국 숨통을 꽉 쥘 수 있는 장소가 됐기 때문에, 케네디의 반발은 거세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만일 흐루쇼프가 철수하지 않겠다고 버텼다면 세계역사는 달라지고 말았을 것으로 본다.

   이 사태로 인해 미·소 양국의 지도자 간의 대화의 길이 열렸으니, 미·소 대립의 완화 역할을 한 빌미가 된 것이 쿠바사태인 거다. 그러나 이 위기 극복에 대해 중국을 비롯한 미국정책에 대한 반대 진영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소련의 항복이라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중국과 인도 국경 문제,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 등과 함께 중·소 분쟁도 격화됐다. 결국 쿠바 사태는 미국과 소련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협조정책으로 변하고 있었으니, 이들과 대립하는 중국과 라틴 아메리카를 무력 해방으로 지원하려던 쿠바정책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고 말았다.


 

    쿠바는 카리브 해의 카리브 제도에 있는 가장 큰 섬과 인근 섬들로 이루어진 아메리카 유일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수도는 아바나, 공용어는 에스파냐어를 쓴다.

    수천 년 전에 타이노족 등 원주민이 농경 등을 영위하고 있었으나, 15세기 들어 최초 백인으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를 발견한 이후,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로 시작된 나라이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사람들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며,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 수는 1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스페인은 노예를 결코 해방시키지 않았다. 미국은 쿠바를 지배하려 했으나 실패를 거듭하다 1898년 미서전쟁(4월~8월)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스페인으로부터 넘겨받게 된다.

    그러나 쿠바국민은 1898년 10월 10일 스페인으로부터 자체 독립선언을 하고 1902년 5월 20일 독립승인이 되었지만 미국의 실질적 식민지로 되고 만다.


 

    1930년 마차도의 쿠데타 이후부터 10여 년간 군사 정권 속에서 쿠바는 성장하지 못한다. 1940년 쿠바 자유당의 바티스타(Batista)가 선거로 정권을 획득하였나 독재의 근원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삶의 질은 향상된 것으로 보이지만, 빈부 격차는 아주 극심해지고 있었다. 1952년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바티스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재 탄생시켜냈으나 여전히 독재는 이어지고 있었다. 바티스타에 대항한 1956년 바르킨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며 혼돈기가 이어진다.


    1959년 1월 1일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1926.8.13 ~)가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독재정권을 세우면서 총리가 된다. 총리에 취임한 후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몰수하는 등 사회개혁을 단행하였고, 그해 제1차 아바나선언을 발표하여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제창한다. 그러나 또 독재정권이 들어 선 것이다.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피델 카스트로는 장장 49년 간 독재를 한 이후, 그 동생 라울 카스트로(Raúl Castro;1931~)에게 2008년 2월 정권을 이양한다. 그 형보다는 완화정치를 한다고 하지만 쿠바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공산독재정권이다.

 

    그러나 라울 카스트로는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직후 2009년 1월 미국과 직접 대화할 의사가 있다고 했고, 2014년 12월 18일 미국과 국교 정상화를 시켰으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서 미국-쿠바 정상회담을 시작하여 미국과 다시 교역을 시작했다. 동토의 땅에 서서히 온기가 들어가고 있을까? 아직은 미지수이다.


 

    6월5일(현지시간) 한국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브루노 로드리게스 쿠바 외교부 장관을 만나 수교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뉴스가 나온다. 한 시간 넘게 회담을 이어간 것으로 나오지만 뚜렷한 대화내용은 없다. 단지 동토의 땅에 발을 디딘 것 자체만이라도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에 버금간다고 자칭했을 뿐이다. 그러나 1999년 김대중 정부에서 외교통산부의 당시 신숭철(申崇澈) 중미국 심의관이 그 땅을 먼저 밟은 적이 있었다.


    1999년 9월 11일자 경향신문은 “외교통상부 신숭철 중미국 심의관이 지난달 하순 쿠바 수도 아바나를 방문, 외무부 및 대외경제부의 고위간부와 회담했다.”며 당시 쿠바정부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자를 발급해준 것에 큰 성과로 보도하고 있었으며 연수생이 오가는 관계개선까지 담고 있었다.

    특히 미국과 교역조차하지 않는 쿠바로서 우리나라와 교역을 하고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어찌됐건 쿠바와 재교역이 이뤄진다면 환영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박근혜정권은 지나칠 정도의 국민 호도내지는 과장된 표현으로 국민을 혼란시키려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국민의 많은 이들이 윤병세 장관의 외교를 두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이유도 없지 않다. 특히 지난 12월 한·일 위안부문제를 두고, 친일적인 자세에 입각했기에 더욱 그렇다. 쿠바도 북한 제재만을 위한 상대로 하는 외교를 목적한다면 세계적인 ‘웃음거리외교’로 손가락질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 목적만을 위하면 주위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기 때문이다.

    논어(論語) 리인(里仁) 편에 공자(孔子)께서도 “이익에만 치우쳐 행동하면 원한을 사는 일이 많다[放於利而行 多怨].”고 말씀 했다.


    북한이 세계적으로 제재를 당할 짓을 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외교를 하던 국가가 아닌 새로운 외교를 트면서까지 북한을 제재하기 위한 목적이 뚜렷해진다면 상대국이 멀리 내다볼 수 없는 나라로 결론을 짓게 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인간은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모든 일이 개인부터 시작되기 때문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쿠바 같은 나라는 개방을 하려고 한다는 것부터가 박수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아직 아무 것도 성사된 것도 없지만 박근혜 정권의 ‘빈 깡통’ 외교와 정치를 보면 참으로 위태로워서 하는 말이다.


사진=외교부 제공



  참고가 된 원문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60606_0014131789&cID=10301&pID=1030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062307015&code=91030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3091&cid=47331&categoryId=4733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8907&cid=40942&categoryId=33492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091100329101012&ed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9-09-11&officeId=00032&pageNo=1&printNo=16850&publishType=0001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sid2=269&oid=005&aid=0000906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