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광주발포결정회의' 참석한 전두환

삼 보 2016. 5. 19. 03:56

    

     파렴치(破廉恥)한 전두환 같은 이를 대한민국은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그는 얼마나 대통령을 하고 싶었으면 수백의 인명(정부 발표만 154명이지만, 일반적으로 600명도 넘을 것으로 추산한다)을 앗았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발포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지난달 27일 '월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도 "광주사태는 사실 나하고 아무 관계없는 일"이라고 광주사태 책임회피로 말했으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리고 그는 5.18 발포에 대해 "국민에게 누가 총을 쏘라고 하겠어, '무식한' 소리 말라"고 하며, "나는 정보, 수사 책임자였기 때문에 발포를 지시할 수 없었다."고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주동자로 몰리는 것은, 대통령이 되지 못한 누군가의 모략”이라며 남에게 핑계를 돌리고 있었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광주에 내려가 뭘 하라는 것인지"라며 구체적 답변도 피했다.

 

    첨가하여 “일각에서 '5.18 당시 광주에 북한군 600명이 침투했다'는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한 질문에 "오늘 처음 들은 얘기고, 당시 누구에게도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러나 18일 한겨레신문을 사진과 함께 ‘전두환 ‘광주 발포 결정’ 회의 참석’이라는 보도를 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집단 발포 직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시민들에게 총을 쏠 수 있도록 하는 군의 자위권 발동 결정에 관여했다는 전두환 정권 때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가 만든 내부 자료가 나왔다. 최근 전 전 대통령이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광주하고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며 계엄군 발포는 자신과 무관하다고 밝힌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18일 <한겨레>가 입수한 <제5공화국 전사>를 보면, 80년 5월21일 오전 10시50분 국방부에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주영복 국방부 장관에게 광주에 출동한 군인들의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는 자리에 전두환 당시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참석했다고 나와 있다. 79년부터 81년 4월까지 5공화국 출범 전후 정치·사회 현안을 다룬 <제5공화국 전사>는 1982년 5월 신군부 실세인 당시 박준병 보안사령관이 6권의 책자와 3권의 부록으로 펴냈다. 이 책은 3질만 발행돼 청와대와 보안사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을 뿐, 내용은 공개된 적이 없다.

 

    자위권 발동을 결정한 국방부 회의 2시간쯤 뒤인 5월21일 오후 1시 광주 금남로에서 시작된 시민에 대한 계엄군의 집단 발포는 오후 4시까지 이어졌고, 단 하루 만에 김완봉(15·당시 중3)군 등 34명이 목숨을 잃었다.(한겨레;2016.5.18.)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44427.html?_ns=t1

 <그 사진은 상단 연결고리에서 볼 수 있음.>


 

     사진에 써진 글은 다음과 같다.

   “21일 2군사에서는 사령관 진종채 장군과 작전참모 김준봉 장군이 헬기편으로 육본으로 올라와 참모총장을 뵙고 이러한 현지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였다”고 돼 있다. 이어 “건의를 들은 참모총장 이희성 장군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하면서 ‘장관에게 직접 보고하자’고 하여 세 장군은 국방부장관실로 갔다. 국방장관실에는 장관을 비롯하여 합참의장 류병현 장군,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 수경사령관 노태우 장군, 육사교장 차규헌 장군, 특전사령관 정호용 장군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며, “회의가 시작되어 2군사령관 진종채 장군이 현지 상황과 지휘관들의 건의...”로 잇고 있는 내용이다.


 

    그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제외시키고서, 주영복 국방장관을 비롯하여 합참의장 류병현, 전두환, 노태우, 차규헌, 정호용 등 6명이 발포명령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내용인 것이다. 고로 전두환은 그 자신만이 발포명령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세우며, 그 여섯 명의 명단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 것 같다. 결국 전두환도 발포명령에 응했다는 결론이 된다. 또한 그 모든 참가자들 중 소수가 반대의사를 밝혔더라도 다수결 원칙에 의해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본다. 세월이 더 흐르면 그 내용까지 확실하게 밝혀질 것으로 본다.


Prime Minister Hwang Kyo-ahn, second from left in the front row, remains silent while other participants sing along

'Imeul Wihan Haengjingok' (March for the Beloved), a song for the 1980 pro-democracy movement, during a memorial

service for the victims at the May 18th National Cemetery in Gwangju, Wednesday./Korea Times photos by Seo Jae-hoon

* <단 한 사람만 입을 꽉 다물고 있다.  박근혜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는 이이다. 그는 국민과  5.18기념식엔 관심도 없는 이라고 본다.

그런데 왜 기념식에 참가했을까?>


  참고가 된 원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137257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42&contents_id=2695

http://community.bobaedream.co.kr/view?code=politic&No=2298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