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마음

세월호와 지하철 사고 대처의 차이

삼 보 2014. 5. 4. 06:32

 

    세상을 살다보면 무슨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 우리의 삶 아니겠는가?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으로 미룬다.

    무슨 말이냐면, 언제든지 삶속에는 죽음이 내제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노자(老子)의 가르침도 “그 정치가 민민하면, 그 백성이 순박할 대로 순박하고, 그 정치가 옥죄듯 하면, 그 백성의 순박함이 없다. 재화의 안에는 복이 의지하는 바이며, 행복 속에는 재화가 잠복하는 바이니, 누가 그 극치를 알 것인가[其政悶悶 其民淳淳 其政察察 其民缺缺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孰知其極].”라고, 재난과 행복은 항상 교차됨을 말씀하고 계신다.

 

   길을 걸어가면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면서 긍정적으로 가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언제든 불화가 올 수 있다는 것에 대비하며 살아가는 자세는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재난이든 사고가 닥쳤을 때 정신을 놓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에게는 어떤 일도 닥칠 일 없다.’는 자긍심을 소유한 사람들도 적잖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제든 나와 함께 모든 이들에게 닥칠 미지의 사건에 대해서 인정하려는 자세는 갖추는 것이 좋다는 말로 해석해야 될 것으로 본다.

 

   세월호 참사에서 더 적은 수의 인명피해가 될 수 있었는데, 세월호 선장을 비롯해서 승무원들의 판단 미숙이, 엄청난 재난으로 변하게 한 것을 감안할 때, 앞으로는 단체행동에서 지휘계통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것 같다는 예상도 하게 한다.

   그게 이번 서울 지하철 2호선 추돌(追突) 사고를 보고 느낀 점이다.

   분명 방송은 승객에게 안정을 취하고 그대로 머무를 것을 두 차례나 방송했지만, 그 방송을 듣고 몇 분도 기다리지 않았으며, 스스로 문을 열고, 철길을 따라 탈출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반대쪽으로 달릴 다른 지하철에 대해 대피할 수 없었을 것을 걱정하게 하는 부분이다. 다행히도 종합관제소에서 빨리 조치를 취해 외선으로 달리는 지하철을 서행할 수 있게 조치하여, 도리어 전조등을 밝혀주면서 승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켰다는 뉴스다.

 

   문제는 승객들의 올바른 판단이 빨리 따라야 한다고 본다.

   세월호 같이 선체가 기울면서 급한 위기로 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면, 탈출할 생각을 해야 할 것으로 본다.

지하철 화재, 폭파 등 급박한 상황을 감지했다면, 신속하게 피신하여, 반대차선의 철로에 진입하는 차량을 의식하며, 탈출을 시도해야 할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차를 받는 소리와 함께 심하게 요동을 처서 불이 나가고 암흑 속이라 해도, 방송이 되고 있다면, 좀 더 차분한 자세로 지휘에 따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하게 한다.

 

   천만다행으로 사망자가 없지만, 또 한 번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 지하철 사고에 두려움이 남게 했다. 하지만 남이 간다고 모두 다 따른 것을 보고, 세월호 참사가 남긴 교훈이, 앞으로 국민들에게 늑대와 소년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게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서울=뉴시스】서재훈 기자 = 2일 오후 3시32분께 서울 성동구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에서 정차해 있던 전동차를

뒤따르던 전동차가 들이 받는 사고가 발생, 관계자들이 현장을 복구하고 있다. 2014.05.02. jhseo@newsis.com 2014-05-02

 

 

 

    첨부; 아주 조용히 죽을 수 있다면

 

   글을 만드는 이 사람은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죽을 준비를 하며 산다.

   길을 걸으면서도 스스로가 지어 부르는 노자송(老子頌)을 하고, 운전을 하면서도 마찬가지다. 항상 눈을 감을 때 편히 갈 수 있게만 해달라고 그님께 부탁을 올린다.

   기왕이면 성인의 깊은 사고를 간직하면서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노자송을 즐겨 부르며 산다.

 

   도덕경 81장 전체를 나름 곡을 넣은 것이다. 물론 가곡, 동요, 그리고 유행가 곡조에서 따온 것도 있다. 그 노래를 부르며 산다는 것이 스트레스 해소에도 보탬이 되는지 모른다. 도덕경을 쉽게 머리에 넣기 위해 노래로 만들어 부른 것이 이제는 마지막 생애에 큰 위안을 주고 있다.

   특히나 미국 같은 곳에서는 혼자 중얼거리며 다니면 약간 이상하게 보는 눈도 없지 않다. 하지만 나름의 생이니 이해하기를 바라며 산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나처럼 중얼거리며 다니는 백인 영감이 하나 늘어서 좋다.

   그는 머리에 헤드폰(Headphone)까지 쓰고, 손으로 기기를 작동하면서 아주 흥겹게 걸으며 즐기고 있다. 그리고 인사도 잘한다.

   얼마나 산다고 이웃과 얼굴을 붉히고 앙앙(怏怏)하며 살 것인가!

   언제든 죽는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고서는 이웃하고 얼마나 화목할 수 있을까?

 

   내 몸이 건강하면 이웃과 즐겁지만, 내 몸이 무거우면 화목도 멀어지지 않겠는가? 내 몸이 건강해야 재난을 당했을 때 옆 사람에게 짐이 되지 않는 법 아닌가. 아니 옆 사람에게 힘을 만들어 줄 기회도 될지 모른다.

   재난이 아니고서도 건강해야 잔병치레를 하지 않을 것 아닌가. ‘오랜 병에 효자 없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도 건강해야 하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건강해야 한다. 그러니 스트레스도 받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

   그러니 건강을 위해 열심히 운동하고 즐겁게 노래도 한다.

 

   공자(孔子)께서도 음악을 즐기셨지 않은가?

   논어(論語) 중 술이(述而) 6편에 “도에 뜻하고, 덕에 의거하며, 인에 의지하여 좇으며, 예에서 즐기며 노닌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고 하셨다.

   공자께서는 즐겨 노래를 부르셨으며, 노래를 잘 부르는 제자가 있으면, 먼저 선창을 하게하고 제자들과 다 같이 따라 부르시기도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악은 사람을 안정되게 만든다. 그래서 좋은 음악을 들으면 즐거워 지지 않는가? 그래서 운전을 할 때는 노자송을 부르고, 차가 서 있을 때 조용하면, 고전음악을 즐긴다. 아주 가는 소리로. 그렇게 죽어 가고 싶어서다.

 

 

   죽고 사는 것을 내 맘대로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노력은 해보아야 하겠기에 최선을 다해보는 입장이다. 그저 몇 분 후에 죽어도 조용히 갈 수 있다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처절하게 생명을 구걸하지 않고, 아주 조용히 부드럽게 갈 수 있게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는 계속 좋은 구조를 기다린다.

 

 

 

  참고가 된 원문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40503_0012895066&cID=10201&pID=1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