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News)와 생각

김무성 선친의 친일과 김무성 행태

삼 보 2015. 9. 18. 05:53

     얼마 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둘째 사위가 자그마치 3년의 세월 동안 마약을 한 혐의가 있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문제는 영어(囹圄=가두어져 있어야할 곳)에서 풀려나 김무성 대표의 둘째 딸과 금년 8월에 결혼을 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딸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세상은 마약을 했다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해하기엔 어려운 현실이란 것이다. 그런데 보통 예수를 빙자해서 하는 말로 ‘원수를 사랑하는 세상’이라든가 아니면, 노자(老子)의 ‘보원이덕(報怨以德=원한을 덕으로서 보답한다)’도 하는 세상에서, 마약하는 사람과 결혼한 것이 그렇게 큰 죄냐며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나오는 이들도 없지 않다고 하니 할 말을 잃게 한다.


   더군다나 ‘사위가 아들이냐?’, ‘사위는 백년손님’이란 말 같이 자식이 아닌 손님인데 어떻게 김 무성대표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냐? 말도 되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고 하니 세상은 어떤 게 기준이며 올바른 것인지를 모르게 하지 않은가! 자신이 옹호하는 사람을 감싸는 것까진 좋다. 하지만 올바른 판단을 하며 감싼다면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게 안 된 세상이라면 참으로 한심한 세상을 살며 호흡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말이다!

   예수의 ‘사랑’과 노자의 ‘보원이덕’은 이런 데에 써먹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내게 한 나쁜 짓을 용서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하신 말씀 아닌가! 객관적인 사고보다는 주관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김무성 대표 같은 공인의 딸은 나 하나가 아닐 때가 있다는 것을 착각하고 있기에 사회가 원성을 내는 것 아닌가! 분명 현실은 마약사범을 올바른 이라고 판단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공인의 딸답게 사랑을 포기할 수 있는 예리한 판단도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 현실이다. 도대체 그 사랑이 어떤 것이기에 수많은 이들이 반대할 사랑을 선택했다는 것인가? 더군다나 그 사위는 10대의 철부지 연령도 아닌 30대 후반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가당치도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치인이든 공인에게 사회는 혹독하리만큼 냉혹한 현실이란 점을 깨닫지 못한 김무성 대표에게 질책하고 있었다.

   김무성 그 한 사람은 아버지 김용주(1905~1985)의 친일로 인해 부(富)를 이어 받고 그 후광에 힘입어 지금 그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다음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내용을 노컷뉴스가 보도한 내용들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17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선친인 김용주씨의 친일행적과 근거 자료를 공개했다.

김 대표 측이 선친의 친일행위를 애국으로 미화하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다.

17일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에 따르면 김용주씨는 1944년 아사히 신문에 일본어로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이라는 제목의 비행기 헌납 광고를 실명으로 게재했다.

당시 국내 신문은 대부분 폐간돼 아사히신문이 주로 읽히던 때였다.


이에 앞서 김용주씨는 1942년 1월 대구부민호 헌납 운동을 주도하고 1942년 2월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군용기 5대 헌납을 선동하는 등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하는 데 앞장섰다.

일본의 조선 쳥년 징병제에도 김용주씨는 힘을 보탰다.

민문연에 따르면 김용주씨는 아사히신문 국내판 1943년 9월 8일자에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이라는 내용의 일본어 기명 광고를 싣고 조선 청년들의 징병제 참여를 촉구했다.


당시 전남방직 회장이던 김용주씨는 1937년 경상북도 도의원으로 당선된 후 국민총력경상북도수산연맹 이사,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과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 등을 지냈다.

민문연은 김용주씨의 친일행적 검증에 나선 것에 대해 "최근 내놓은 평전 '강을 건너는 산'을 통해 김 씨의 친일행위를 애국으로 미화하고 있고, 아들인 김 대표는 한국사 국정화에 앞장서는 등 역사 왜곡의 선도 역할을 자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실장은 “김용주씨의 친일 행적을 검토한 결과 '친일인명사전' 등재 기준에 부합한다”며 “향후 개정판을 낼 때 수록대상이 될 게 확실하다”고 말했다.(노컷뉴스;2015.9.17.)


   아직까진 김무성 대표 가문이 친일파에 속한 사실은 없었다고 했더라도 오래 전부터 그 선친의 이름 석 자 김용주의 친일 행적은 언론에서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각인됐다는 것으로 본다. 이런 이는 정치를 해선 안 된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7년 37세의 김무성을 통일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했다.

 

  다음은 위키백과에 나온 김무성의 생애 일부이다.


김무성은 1951년 9월 20일에 부산에서 아버지 김용주와 어머니 방연숙 사이에서 4남 1녀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1976년에 동해제강에 입사하였고, 1982년 32세의 나이에 삼동산업의 전무가 되었다.

1987년 37세에 통일민주당의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를 통해 정계에 입문하여 상도동계가 되었으며, 민주화추진협의회에도 참여하였다. 1986년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고, 1985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직을 역임했다. 1987년에는 통일민주당 제13대 대선 대책본부 재정국장이 되었는데, 후보단일화 실패로 인해 당시 통일민주당의 대선 후보였던 김영삼은 선거에서 2위로 낙선하였다. 같은 해에 통일민주당 총무국장, 당 기획조정실 차장을 역임하였고, 1989년에는 국회 행정실장을 역임하였다.


1990년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자, 김영삼과 김덕룡 등과 함께 민주자유당 당원이 되었다. 이후 민주자유당의 의사국장과 의원국장 등을 지냈다.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대선 후보 추대대책위원회의 총괄국장을 맡았다. 1993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행정실장,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94년에는 대한민국의 제48대 내무부 차관을 역임하였다. 1996년에 신한국당 소속으로 제15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남구 을에서 당선되었다. 2005년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 회장 및 한나라당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생략 (위키백과)


   선친인 김용주의 부의 권력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김영삼 정권에 붙어 결국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사무총장으로 이어지며 현실에 닫게 됐다. 김무성 대표를 보면 과거 친일파들의 부와 권력의 행태(行態)가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가장 ‘표준이 되는 친일의 후손’들이 우리나라에 산재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물론 박근혜 라는 인물도 그와 다를 바 없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친일을 넘어 천왕에게 피의 충성맹세까지 한 인물이니 김무성의 선친인 김용주보다 한 걸음 더 앞서 간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후손들이 지금 그대로 우리나라 정권을 휘어잡고 있으니 한국은 일본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로 박근혜가 일본과 쉽게 정상회담을 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박정희와 차별을 두고 싶어서? 물론 위안부 문제를 앞세워 일본의 아베 총리가 수긍을 하지 않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다는 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일본과 거리를 둘 수 없다는 것을 알리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 일본과 거리를 좁혀가야 한다. 그게 각본처럼 나타나고 말 것이다. 물론 일본에 거주하는 우리 민족과 민족적인 사업이 벼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일본과 거래를 해야 하지만, 우리의 주권은 또 뒤로 밀린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누가 일본과 같은 권위를 유지하면서 우리의 자주적 권리를 지켜 갈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인가가 앞으로 우리 정치의 숙제라고 할 수 있다. 그 해답을 누가 풀어 줄 수 있다는 것인가?


   만일 김무성 대표가 차기 대권을 거머쥔다면 우리나라는 광복 100년이 지나도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내다보지 않을 수 없다. 그 나물에 그 밥이 계속 이어질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으로선 차기 대권까지 거머쥐기 위해 김 대표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나!

   여당 측에선 쉽게 가지 못했던 노무현 묘역도 김대표는 금년에 방문했다. 그리고 탄탄대로로 쭉쭉 뻗다가 둘째 마약사위로 인해 주춤하며 멈춰서고 있는 상태다.

   우리나라도 일본과 그렇게 다르지 않는 것은 우익의 용트림이다. 보수진영의 돈 줄을 타고 그 세력들이 권력을 휘두르면 진보 쪽은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변하고 마는 것 말이다. 진보들의 두뇌가 명석하면 뭐할 것인가? 돈으로 그 입들을 모조리 틀어막고 언론에서 뒤로 밀어버리면 간단히 해결되는 것을 말이다.

   남북통일은 고사하고 일본의 그늘에서조차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넘어가야 한다. 고로 더 이상 친일 세력이 이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재계의 곳곳엔 친일의 독사를 위한 꽈리들을 틀고 있으며, 정계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야권은 국민의 기대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지만, 자꾸만 더 멀어져 가기에 바쁘다. 그게 우리나라엔 아직도 남북통일을 위한 운명의 화신이 나타날 때가 아니라는 것인가? 아니면 남북통일의 화신이 야권에 없다는 것인가? 분명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고도 한국의 주권을 앞세워 자주통일을 할 이가 나타날 것 같은데 그럴 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 우리의 슬픔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부친인 김용주씨가 1944년 7월 아사히 신문에 게재한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 광고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김용주씨가 실명으로 아사히 신문에 게재한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들이여'광고 (사진=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참고가 된 원문

http://www.nocutnews.co.kr/news/4475437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509172309169610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AC%B4%EC%84%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