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고 또 적다(積多)

롯데그룹 재산싸움에 왜 국민관심?

삼 보 2015. 8. 2. 07:49
롯데가 한국에서 성장하게 된 동기도 그 경영권 전체를 신격호(1922~) 총괄회장이 그 권한을 쥐고 있어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이 간다. 그러나 형만한 아우가 없다는 말과 같이 그 아우들(그 형제 5남5녀)은 맞형의 진실된 마음을 배반하기도 하고 동생의 어릿광대 짓을 형에게 거침 없이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유난히 형제 간 다툼이 많은 것 같은 롯데의 과거사에서 보면 말이다.

 2015년에는 아버지만한 아들이 없다는 말처럼  그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끌어내릴 생각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 같다. 물론 형제 사이에 분쟁으로 알려졌던 사실과 다르게 변해 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좌우간 일본에서 10대 재벌에 꼽히며, 한국에선 5대 재벌에 들어가는 재벌그룹의 내란에 왜 국민의 관심이 지대한 것인가? 일본의 영향력과 한국의 영향력이 그 안에 있어서 일까? 아니면 그저 집안의 재산 싸움일까? 일본의 피가 섞인 그 아들 중 유난히 일본 영향력에 강한 그 둘째 아들과  고국을 향햔 애국심이 강한 신격호의 싸움이 시작된 것인가? 둘째가 귀국하면 그 내막이 밝혀질까?

 디음은 JTBC 보도 내용이다.


지난달 28일 신격호 총괄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때만 해도 장남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동생 신동빈 그룹회장 사이의 다툼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신 전 부회장이 KBS와의 인터뷰에서 신 총괄회장과의 대화 내용을 공개하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신격호 : 아키오(신동빈 회장 일본 이름)도 그만두게 했잖아]

[신동주 :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신동빈이 아버지를 대표이사에서 내려오게 했습니다.]

[신격호 : 신동빈이? 그래도 아무 말 안 하고 있을 거냐?]

또 자신은 신동빈 회장을 후계자로 승인한 적이 없다는 내용의 서류도 함께 공개됐습니다.

아들 신동빈 회장이 아버지의 뜻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며, 이번 경영권 분쟁이 형제간의 문제가 아니라 부자 간의 다툼인 것이 확인된 겁니다.

신동빈 회장 측은 이에 대해 총괄회장 의중이 경영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사회 등 절차를 벗어난 의사결정까지 인정될 수는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한편 일본에 머물던 신 회장은 이르면 월요일 입국해 입장을 밝힐 예정입니다.(JTBC;2015.8.1.)


 롯데가 일어난 것은 신격호 총괄회장의 격변기를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참으로 난세의 영웅을 보는 것만 같은 것도 없지 않다. 물론 그의 과오도 없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생애로 볼때 그는 그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서다.

 1922년 10월4일 일제 강점기에 신격호는 경난 울산군 삼남면 둔기리에서  신기수와 김필순 사이에서 태어난다. 집안이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그 당시 부산에 있는 부산 공립직업학교를 1940년 졸업을 했으니 말이다. 그 이전 18세의 나이에  그는 같은 동향의 한 살 연하인 노순화(나이 29에 요절)와 결혼하여 1942년에 신영자(현 롯대호텔 고문)를 낳았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1941년 신격호는 말을 돌보는 직업을 팽개치고 일본으로 밀항을 한다. 그러나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와세다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 전공을 살려 그 당시 인기 종목이 아닌 껌 장사를 시작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허기진 일본인들을 상대로 비인기 종목의 껌장사는 순탄하게 발전하게 된다. 특히 풍선껌은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고 1948년 일본에서 (주) 롯데가 설립된다, 1959년 롯데상사, 1961년에는 롯데부동산, 1967년엔 롯데아도가 시작되면서 돈을 마구잡이로 걷어들인다. 1968년엔 롯데물산과 주식회사 훼밀리 등을 설립하며, 상업 및 유통업으로 일본 10대 재벌에 올라서고 만다. 그리고 야구단 롯데 오리온즈가 1969년 결실을 맺게 된다. 그는 지금까지 3대째 구단주를 하고 있다.

 그는 유난히 고국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66년 한국에 진출하면서 롯데 알루미늄을 먼저 세운다. 그해 신격호의 바로 밑의 동생 신철호(1923~)가 형과 그 바로 밑의 동생(세째) 신춘호의 도장을 위조하여 회사공금 4억 2천만 원을 횡령하여 형으로부터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형제 간 첫 분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1967년에는 롯데제과를 설립하면서 한국에 새로룬 과자들이 등장한다.
1973년 세째 신춘호와 법정소송이 벌어지기도 한다. 같은 해 롯데호텔이 국립도서관 자리를 사들여 논 소공동에 지어졌다. 그 당시 그 땅을 소유할 수 있었던 그 배경이 어떠했을까? 그리고 롯데전자, 롯데기공이 설립된다.
1974년에는 롯데산업, 롯데상사, 롯데 칠성음료가 이름을 바뀌 롯데그룹으로 귀속하게 된다.
1978년에 롯데삼강이 들어오고, 롯데건설이, 롯데 햄, 롯데우유가 등장하게 된다.
1979년 롯데 쇼핑을,
1980년 한국 후지필름,
1982년 롯데 캐논이 설립돼 그야말로 그룹을 비대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경영철학은 달랐다. 지금껏 81개 그룹 중 8개 회사만 상장시켜 국민의 기업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그만큼 세금도 더 내야 했을 것이다. 그는 2006년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부호 136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1996년에는 막내동생 신준호와 토지문제로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생들의 반란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본다. 자그마치 10남매를 부모가 생산했으니 각기 다른 생각의 형제들이 날 수 있다고 본다. 그 중 특이하고 욕심 많은 동생들이 왜 없겠는가? 영산 신씨내는 1969년 국가는 울산공단을 만들면서 공업연수를 만들기 위해 대암댐을 건설했다. 그로 인해 둔기리 일대 40여 호의 영산 신씨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지고 말았다.그러나 신격호는 유난히도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극한 효성이 있어 '둔기회'를 설립하고 가난한 형제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매년 5월 첫째 주말에 '둔기회'가 모이는데 지금은 1100세대가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신격호는 대암댐 근처에 별장을 짓고 1년에 한두 번은 선친의 묘소에 참배를 하며 효성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18세 나이에  첫 결혼을 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성공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와 결혼을 한다. 그 부인이 시게미쓰 가문의 전범의 딸이라는 말도 있으나 롯데 가에서는 그게 아니라고 부인도 하지만 확실치는 않은 점이 있다. 하쓰코 일본 여인으로부터 두 아들을 얻었는데 그 큰 아들과 둘째가 다투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 둘째가 아버지를 롯데 홀딩스의 이사회에서 제명시킨 것으로 뉴스는 나오고 있다. 결국 아들이 아버지를 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알려지지만 아직 확실한 근거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93세의 노령인데다 젊은 시절 자기 어머니를 외롭게 했다는 그 한이 서려 그 한을 품었을까? 그 두 아들들은 두 나라의 피가 흐른다. 하지만 큰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 그 형제들과 집안 어른들에게 섭섭치 않게 했지만 둘째는 기업을 살리기 위해 과감하게 경영자를 물색하며 외부로부터 받아들였다. 그로써 그 형제들과 삼촌들이 큰 아들 손을 더 들어 후계자로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신격호 그 개인에게 있어 세 부인이 있다. 세번째는 지금 롯데 호텔 고문으로 있는 신유미(32)의 어머니로 알려진 서미경(55)이다. 신 총괄회장에게 있어 가장 큰 손가락질을 받게 한 여인이다. 호적에 올라가지 못한 그 여인으로 인해 하쓰코라는 일본 여인은 외로움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1981년 롯데그룹은 자사 모델을 선발하기 위해 미스롯데를 탄생시킨다. 그 때  서미경이 신격호 회장에게 눈도장이 찍힌다. 그로부터 서미경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갔다. 결국 1983년 신유미를 낳고 스크린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38세의 연령차가 있던 그들의 합체는 세상 이목에서 크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돈으로 한 여성이 팔려간 것 같은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불륜의 항거라고 해야 할까? 서양 문물이 들어왔어도 그 당시 한국사회에선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은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신격호는 돈으로 젊음을 향유하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효성이 지극했던 신격호에게 갑자기 부모의 효성에 재를 뿌린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1999년 3월 4일 울산광역시에 1973년 세상을 뜬 아버지의 유골이 도난당한 사건이다. 돈을 뜯으려는 유골 도적들은 8억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3월7일 어설픈 이들은 경찰에 잡히고 말았다. 결국 쉽게 돈을 벌려든 이들은 쇠고랑을 차고 말았다. 부모에 대한 지극한 정성은 누구 못지 않았으며, 형제들이든  일가친척에게도 각별히 베풀고 살았지만 부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세관의 이목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언론에서도 여성문제는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세상은 도를 넘어서면 말이 많은 법이다. 아무리 국가관이 투철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며, 형제들과 우애가 있었지만 부인들로 인해 그의 일신에 금이 가기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박정희 정권을 등에 업고 한국에서 부를 확고히 했기에 그로 인해 정경유착에서는 빠져나가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형제들을 잘 포섭해서 자신에게 닥쳐올  영어의 몸에서는 잘도 빠져 나갔다. 앞으로 얼마나 오랜 시간 그가 숨을 쉬며 살아갈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똑똑하고 인복이 있어 부호의 삶을 살았을지라도 결국 한국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 많은 재산을 가져갈 수도 없다. 다 놓고 가야하기에 그 아들 중 둘째가 먼져 손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도 결국 다 놓고 갈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재산을 증식시킨 것에 한 몫을 한 것이 국민이었다. 자신들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롯데 껌을 팔아준 것만 얼마일지 잘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국가 재산이라는 것을 신격호도 모르고 살고 있으니 안타까운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