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 새해 들어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언론 매체들의 진지한 보도가 올라오고 있다.
국민과 대화로서 풀 수 있는 일도 입을 봉하고 자신만의 아집과 독선으로 똘똘 뭉쳐있어 국민의 빈축을 샀던 대통령이라는 이가 북한 정상과 대화를 하겠다고 나선다면 이해를 해줘야 할까? 그녀는 올 신년사에서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단절과 갈등의 분단 70년을 마감하고 신뢰와 변화로 북한을 이끌어내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통일기반을 구축하고 통일의 길을 열어갈 것입니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시키지 않는 한 대화할 가치가 없다고 강조했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31일 신년사에는 그 말은 사라지고 없다.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통준위; 위원장 박근혜)는 지난해 12월 29일 북한에 대고 남북회담을 불쑥 제안하고 나섰다.
현 정권은 지난해 크고 작은 남북회담을 32회 걸쳐 실시된 사실이 있는데 거둬들인 수확은 거의 없다는 논평이다. 회담 참석자들의 정치적 위상도 문제였다고 보며, 대북 전단지(삐라) 문제 등으로 회담에 대해 돌출변수들이 튀어나오면서 번번이 실패했다고 보는 눈이 정확하다. 그러나 대한민국 최고 수장의 위치가 되면 누구든 북한과 회담을 꿈꾸는 것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하고,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휘어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앞세워 북한과 암암리 막후접촉을 한 사실 등을 미뤄볼 때 그러하다.
전두환 시절 이후 남북정상회담 논의가 이따금 나올 때마다 남측은 매달리는 듯했고, 북측은 튕기는 모습이 역력했다.
김기협 역사학자는 지난해 12월 18일자 프레시안 뉴스에서 논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경제상황으로 나타난 체제경쟁에서 북측이 불리하기 때문에 급격한 접촉 확대를 꺼린 것이다. 또 하나는 북측과 달리 남측에는 정권의 경쟁이 있기 때문에 정상회담 성사의 공로를 다투는 상황에 있었다. 노태우 정권은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일부러 고위급회담의 진행을 늦췄다는 지적이 있고, 김영삼 정권은 정상회담 욕심 때문에 대북정책이 혼란스러웠다는 지적이 있다.(프레시안;2014.12.18.)
이명박 정권도 3차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막후 접촉한 사실이 있었다. 이 대통령 특사로 임태희 전 노동부 장관은 2008년 10월 싱가포르에서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비밀리에 회동했다. 양측은 북핵문제를 논의하자는 데는 합의했으나, 납북자 및 국군포로송환문제와 대북식량지원문제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였다. 그해 11월 양측 실무진이 개성 자남산여관에서 2차례 비밀접촉을 했었다. 2009년 5월 9일 김태효 당시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은 베이징을 방문해 북측인사를 만났지만, 양측의 협상은 성사될 수 없었다. 우리 측은 이 사실을 비밀에 붙였다. 그러나 북한은 2009년 6월 1일 국방위원회 대변인을 통해 충격적인 내용을 공개하고 말았다. 우리 측이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사건에 대해 북한이 사과한다면 정상회담을 갖자.”며 구체적인 시간표를 제시했다고 하면서 북측이 이를 거부하자 돈 봉투까지 쥐어주려 했다고 폭로하고 말았다. 결국 정상회담을 위해 구걸했다는 비판이 일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분단 70년 동안 실제적으로는 단 두 차례 북한 정상과 남북정상회담을 성사를 시킨 일이 있을 따름이다.
다음은 국민일보 보도 내용 일부다.
1·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수 십 차례의 막후접촉으로 북한 최고 지도부의 의중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민하고 돌발 변수가 많은 남북관계의 특성상 공개적으로 정상간 만남을 거론하기에는 한계가 많다. 막후접촉 필요성이 제기되는 가장 큰 이유다.
김대중 정부 당시 남북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이 제기된 것은 2000년 1월말이었다. 북한 지도부가 금강산 관광과 소떼 방북 등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맺은 현대그룹을 통해 우리 정부에 정상회담 추진의사를 전달해오면서였다. 이후 북한과의 막후접촉은 당시 문화부 장관이던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이 맡았다. 그해 3월 17일 박 의원은 중국 베이징에서 송호경 당시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협상을 시작했다. 박 의원은 평양·상하이 등지에서 모두 5차례 비밀접촉을 했다고 한다.
실무접촉은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과 임동옥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이어갔다. 5월 27일 개성에서 첫 만남을 가진 두 사람은 6월 15일 1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간 만남으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비밀접촉의 후유증도 컸다. 정상회담 개최 조건으로 4억5000만 달러가 북한에 송금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2차 정상회담 역시 막후접촉으로 이뤄졌다. 2005년 6월 17일 ‘6·15민족통일대축전’참가를 위해 방북한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노무현정부는 정상회담을 원했지만, 대화채널이었던 북측 김용순 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과 송호경 부위원장이 사망한 뒤 대체할 만한 인물을 찾지 못해 애를 태웠다. 정 전 장관 방북시 북측 실무자였던 임동옥 제1부부장은 1차 남북정상회담실무교섭 창구였던 인물이다.
2006년 10월 노무현 대통령 측근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중국 베이징에서 북측 인사와 비밀접촉을 시작했다. 그해 11월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비밀협상 책임자로 나섰다. 2007년 7월 노무현정부는 북측에 김 전 원장과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간 고위급 접촉을 제의했다. 북한은 8월초 김 전 원장을 비공개 초청해 ‘김-김 라인’이 가동됐다. 그는 8월 2~5일 연달아 두 번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해 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국민일보;2015.1.4.)
돈을 퍼다 주면서까지 북한과 정상회담을 하려는 대한민국 국가 수장들의 속내를 어찌 쓰르라미들이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1·2차 남북정상회담은 결국 실패작인 것으로 남고 말았다. 정상회담을 끝낸 북한은 꼭 뒤끝을 보여주었다. 서해를 통해 교전을 시키지 않으면 핵실험(2006년10월 1차 핵실험)으로 은혜에 대해 충격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래도 좋다며 웃음을 웃으며 남북정상회담을 하는 수장들의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며 국민은 외면하고 말았다.
만일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금년이든 언제든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대한민국 국민들의 입장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당장 다음 달 말부터 시작되는 키리졸브 훈련과 한미 연합군사 훈련이 3월중까지 계속 될 것이다. 1일 북한 김정은의 신년사에서 한미 연합군사 훈련 중단을 요구했지만, 2일 국방부는 거절하고 말았다.
거기에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북한의 핵무기에 신경이 곤두서있는 상황에서 과연 박근혜와 김정은이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박근혜는 북한의 핵을 인정한다는 말이 된다. 결국 북한의 핵을 처리하지 못하는 한, 3차 남북정상회담은 북한에 날개만 달아주는 꼴이 될 것이다. 박근혜를 지지했던 국민들의 심정은 지금 어떠할 것인가?
참고가 된 원문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9003925&code=61111111&cp=nv
http://www.ytn.co.kr/_ln/0101_201501031656317490
http://daily.hankooki.com/lpage/politics/201501/dh20150104132721137430.htm
http://www.ytn.co.kr/_ln/0101_201501010716475946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2533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02/20150102022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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