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헤이그와 이준 열사 그리고 우리 외교

삼 보 2014. 3. 25. 09:40

     네덜란드의 헤이그(Hague in Netherland)라고 하면 번쩍 떠오르는 이름이 이준(李儁;1859. 1. 21~1907. 7. 14)열사다.

 

   이준 선생은 대학자인 아버지 이병관과 어머니 청주 이씨 사이에 태어났으나, 철도 들지 못한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어 어머니까지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대문장가인 할아버지 이명섭과 작은 아버지 이병하로부터 한 학문을 했다 한다. 상경하여 후학을 길러내는데도 힘을 더했으며, 1895년 최초로 설립된 법관 양성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최초의 검사로서 오래 동안 법관 생활은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탐관오리들로부터 질시와 중상모략에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이후 서재필 선생을 만나 독립신문을 간행했고 독립문 건립에도 참가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1898년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을 졸업했다. 귀국하여 만민공동회에 참가하고 거리 연설로 비정탄핵(秕政彈劾;나쁜 정치를 탄핵)을 하다 이승만등 17인과 투옥되기도 한다.

   1902년 효율적인 구국운동을 하기 위해 민영환, 이상재, 이상설, 이동휘, 양기탁, 남궁억, 노백린, 장지연 등과 같이 개혁당을 조직했으며, 국민을 설득하는 명연설을 남겼다. 선생은 당시 안창호와 이상재 등과 함께 대 웅변가로 알려지고 있다.

   1904년 일본은 러일 전쟁을 승리로 대한제국에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했다. 그에 따른 일본의 횡포를 막아내는데 최선을 다했다. 특히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막았으며, 친일의 일진회를 막기 위해 윤하영, 양한묵 등의 동지들과 함께 공진회를 세웠으나 결국 황주 철도로 유배되고 만다.

   1905년 을사오적(박제순,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과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조약을 성사시켰으니,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만 것이다. 그에 항의하고 나섰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 1907년 7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국제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는다. 주위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고종을 면담하여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협박으로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받아냈다.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특사는 정사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부사로는 전 평리원 검사인 선생과 전 주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으로 구성되었다.

만국평화회의보(1907년 7월 5일자) 1면에 실린 헤이그 특사들 사진.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선생이다.

 <출처: prix at ko.wikipedia.org>

 

 

   이준 열사와 이상설, 이범진, 이위종 등 네 명은 어려운 걸음으로 헤이그에 도착하여 일본의 불법을 국제적으로 알리려 했으나, 러시아와 영국 등 열강은 냉담했다. 결국 네덜란드조차 우리 특사들을 소개하려 하지 않았다.

말만 세계평화회의였을 뿐 제국주의자들은 자기 속만 채우려 했다. 자그마치 만국평화회의는 1907년6월15일부터 한 달간 개최했지만, 참가국 46개국과 그에 따른 247명 대표들의 잔치일 뿐이었다.

 

 

   일제는 우리 특사들의 노력에 위기감을 갖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특사들의 활동을 저지하고 나섰다. 하지만 3명의 특사는 일제의 방해에 굴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입장과 일본의 부당성을 웅변으로 호소했다. 각국 신문기자들은 모여들었고, 그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설명했다. <평회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에 [장서]전문을 게재 하였다. 7월 9일에는 협회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연설 할 기회를 얻어 삼 개 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연설했다. 이위종의 열정적인 호소는 참석한 각국의 이름난 언론인은 물론, 평화회의의 각국대표 및 그들의 수행원들까지도 감명을 받고, 아낌없는 찬사를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각국 대표들은 공공의례를 들어 한국의 청원에 공감하지 않았다. 결국 이준 선생은 격분한 나머지 애통한 마음을 담아 자신의 배를 가르고 만다. 그날이 1907년 음력 7월 14일. 선생의 한은 영원히 남고 만다.

네덜란드의 헤이그 바겐 스트라트 124번지. 선생이 순국한 곳으로 현재는 선생의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가 잠자고 있는 헤이그.

   당시 우리의 힘은 그렇게 빈약했다.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것을 알리려 했으나 세계는 우리에게 냉정했다.

   그럼 2014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3차 핵안보정상회의는 어떤가?

 

개막식 기조연설에서 "북한은 핵무기비확산조약(NPT)과 유엔 안보리결의 등을 어기고 핵개발을 추진하면서 핵능력을 고도화하고 있다. 만약 북한의 핵물질이 테러 집단에게 이전된다면, 세계 평화에 큰 문제가 될 것"이라며 "3년전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유사한 재앙이 테러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북한 핵시설의 안전성 문제도 큰 우려를 낳고 있다. 지금 북한의 영변에는 많은 핵시설이 집중되어 있는데, 한 건물에서 화재가 나면 체르노빌보다 더 심각한 핵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란 지적"이라고 언급했다.(Wikitree;2014.3.24.)

 

 

   이 말에 대해서는 논평이 엇갈리고 있다.

박 대통령 언급은 지난 1월 영국 군사전문기관인 IHS 제인의 보고서에 나온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울의 모 교수 코멘트를 인용한 이 보고서는 발표 당시에도 많은 원자력 전문가들로부터 사실과 다르다는 지적을 받았다. 영변 원자로와 1986년 사고가 난 체르노빌 원전은 모두 흑연을 감속재로 쓰고 있지만 규모와 구조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무리라는 것이다.

 

영변의 5MWe 실험용 원자로는 열출력 기준으로 체르노빌 사고 원전의 128분의 1에 불과한 소규모다. 핵연료 연소도도 매우 낮다. 영변 원자로가 노후한 것은 사실이나 폭발 사고로 노심 파괴가 발생한다 해도 방사성물질 유출량은 체르노빌의 200분의 1 정도라는 것이 전문가들 분석이다. 영변 핵단지 한 곳에서 화재가 발생한다고 해서 연쇄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는 상정하기 어렵다.

 

 

한 원자력 전문가는 “대통령이 핵안보를 다루는 정상들의 국제회의 연설에서 과학적 근거가 없는 말을 하게 된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잘못된 정보를 대통령에게 전달한 청와대 참모들 책임”이라고 말했다.(경향신문;2014.3.24.)

 

   이번 헤이그 핵 안보회의는 세계적으로 53개국에서 참가한 것으로 돼있다. 핵 안보회의도 결국 평화를 위한 회의 아닌가. 무엇보다 그 나라의 핵 안보를 조심스럽게 다루려는 뜻은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발언은 상대국을 자극시킬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할 것 아닌가? 더군다나 말을 부풀린다면 신뢰도 떨어질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어찌됐건 적든 크든 핵시설이 파괴될 가능성에 대해 두려움은 크다.

 

 

   더해서 25일 한·미·일 3국 회담이 헤이그에서 열리게 된다는 것을 두고, 과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어서다.

   1907년 당시 만국평화회의에서 우리 특사들은 겨우 발언권을 하나 얻기는 했어도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했기에 감히 국제적으로 뜻을 피울 수 없었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의 국제 위상은 어떤가? 감개가 무량하다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헤이그(Hague).

   인구 509,779명(2014)의 그렇게 크지 않은 도시. 그러나 네덜란드에서 수도 암스테르담(Amsterdam)과 로테르담(Rotterdam)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라고 하는 헤이그.

   정부 주요 기관이 들어서 있어 정치의 도시라는 말도 한다.

   17세기부터 세계 주요회의를 여러 번 개최한 도시이다.

   국제정치(International Politics)에도 아주 깊숙이 개입한 도시다.

   헤이그에는 150개가 넘는 국제기구 본부가 자리하고 있다.

   국제사법재판소(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를 시작으로 수가 없이 많다.

   

“평화와 정의의 국제도시(international city of peace and justice)”라는 말처럼 1899년에 초석을 두었다.

   기후는 해양성기후로 온화하다.

   겨울은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거의 없고, 여름에는 평균 섭씨 20도를 잘 넘지 않은 도시로 유명하다. 이따금 겨울에 영하16c까지 내려 간 기록도 없지 않으나, 극히 흔치 않은 일이라 한다. 여름에도 34도c까지 오른 때도 있었다고 한다.

   무난한 날씨 같이 모든 일들이 무난히 잘 되어주길 바란다.

평화 궁정(The Peace Palace)

   참고가 된 원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2875&cid=40942&categoryId=34086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457443&cid=768&categoryId=1855

http://en.wikipedia.org/wiki/The_Hague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29193&cid=40942&categoryId=34672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9&contents_id=4334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6555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3242320005&code=910302&nv=st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