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부터 시작된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에게 많은 위로와 화해의 장이 될 것을 먼저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소탈하고, 검소 검약한 성품인데다 익살스럽기까지 한 교황은 어디를 가든 ‘프란치스코 환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왜 서양의 종교지도자에게는 이렇게 유약하게도 친근하며, 만인에게 자신을 낮추는 어른이 있는데 반해, 대한민국 속에서는 정치인은 고사하고 종교지도자까지 나타나지 못하셨는지?
그놈의 권위에 얽매여 살아온 전통적인 삶에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보게 한다.
양반과 평민, 그리고 천인이 함께 자리한 이조 500년 역사가 권위를 바탕으로 민족 문화를 이끌어 온 그 비중이 지금까지 우리를 목에 힘주게 하고 있음 아닌가?
우리나라 남성 중 대부분이 남성이 웃음이 많으면 타인으로부터 헤프게 보인다고 각별히 주의를 받던 그 과거가 함께한 것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로부터 독립해 살아온 69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우리는 그 암흑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자해의 한 틀이다.
일제는 일제를 따르는 자(친일파)를 골라 편하고 안이한 자리에 앉혀놓고, 그 반대세력을 장악하게 만들었다. 결국 같은 국민끼리 헐뜯고 물어뜯는 장면을 일제는 노렸고 그에 긴 박수를 보내며 한민족을 우롱했다.
그에 놀아난 친일세력은 일제로부터 같은 동포의 피를 핥게 만드는 것조차 모르고 좋아했고, 그 36년 동안 당했던 국민은 치를 떨지 못해 지금도 그 잠꼬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우환과 비굴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환하게 웃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대한민국은 겨우 5년 동안 국가를 재건할 수 있었던 기간이 있었을 뿐, 세계 제국주의자들의 총칼과 군화 발밑에서 또 한 번 슬피 울어야 했다. 1950년 6월25일 새벽부터 공산주의자들은 이념투쟁의 열매를 맺게 하겠다고 좁고도 작은 이 한반도에 피를 뿌리게 만들었다. 화해와 평화를 위한 태동조차 알 수 없었던 한반도는 공산주의자들의 시험의 장이 되고 있었으니 이 또한 우리의 숙명이란 말인가?
이조 500년 역사 속에 평민과 천민의 삶은 없었다. 그 삶을 바꿔보기 위해 한반도에 기독교 평등사상을 들여오게 한 것이 서양 선교사가 아닌 우리 선조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에서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인권 평등을 한반도에 도입하는 과정에서 자그마치 1만 이상의 순교자를 내고서야 이 땅에 겨우 자리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 중 103위가 복자를 거처 성인(聖人)의 품으로 올라 있었고, 이번 교황 성하의 방한에서 광화문 시성식에 의해 124명이 복자(혹은 복녀)의 품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가톨릭이 한반도에 가져다 준 가장 큰 혜택은 인권평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혜택을 가져다 준 가톨릭의 최고 수장이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반도 국민으로부터 환영 받아 마땅한 것 아닐까?
맞다. 당연히 환영해야 할 인물임이 그르지 않다. 그런 그 분에게는 또 다른 인품을 겸비하고 있었으니 더욱 그를 존경해야 할 것이다.
제266대 프란치스코 현 교황 이전 역대 교황 중에 이분만큼 겸손한 덕을 갖춘 분이 왜 없었겠는가만 유별나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최근 가톨릭에도 이만한 교황이 없으셨다는 것을 알게 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진정한 권위는 섬김 그 자체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의 교황 권위는 역사적으로 찬란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 교황이 머리에 쓰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걸치고 있는 의상, 그리고 빨간 구두까지 모든 소품들이 교황을 사도들의 우두머리로 만들어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소탈한 성품으로부터 그 권위가 하나 둘 낮게 내려앉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한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행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계신 것으로 넘겨야 할 일이다. 그러나 언론 매체를 통해 우리 눈으로 들어오는 교황의 언행은 성인의 자세 같이 보이고 또는 들려오고 있다.
왜? 그야 종교인들조차 프란치스코 교황만큼 언행이 일치하지 못한 것에 반항하는 것 아닌가?
지난해 12월 5일 세상을 떠난 남아프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1918~2013) 같은 인권운동가이자 정치가 같은 분이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세기에 한 분 나올까 말까해서 인정하고 또 인정을 했다. 정치인이 성스럽게 삶을 살려는 것에 감명을 받아서일 것이다.
물론 종교인들도 나름 언행일치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정치인들만큼 괴팍하고 억센 이들과 겨누지는 않지 않은가! 그렇게 본다면 종교인들의 성스러움은 자연의 이치처럼 자연스럽게 인간의 삶에 물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게 인간의 심리 아닐까? 종교인들이 정치인들보다 더 잔인하다고? 그야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처음부터 완벽한 인간이었거나 뛰어난 인간이어서 위인이 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위인이 된다는 것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견디기 힘든 일이 많았겠지만, 신의 진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견뎌낼 수 있어 결국 위인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을 알게 하지 않는가?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0.2 ~ 1948.1.30)와 같은 인도의 성자를 볼 때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을 이해했기에 무력이 아닌 비폭력으로 세상을 평정할 수 있었지 않은가?
간디는 준엄하게 스스로의 몸을 관리하면서 민중의 앞에 서서 11번의 단식을 통해 영국에 대한 무저항과 불복종운동과 인도국민의 결속을 독려시켰다. 결국 농민과 노동계급의 자각과 생활향상을 증진시켜 인도 민중사회의 자립과 해방의 정치적이고 사회적 지반을 쌓았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브라흐마차리아(Brahmacharya: 순결(純潔), 아힘사(Ahiṃsȃ: 불살생ㆍ비폭력=산스크리트 어(범어), 사티야그라하(Satyagraha: 진리파지)로 요약되는 범어(梵語)에서 시작된 것을 보듯 간디의 정신세계는 신의 진리를 인정했기에 이룩한 것으로 보게 한다. 그의 이러한 생애와 사상은 높이 평가되고 있어 현대의 성자로 추앙받게 된 것인지 모를 일이다.
정치적으로 깊은 신앙심을 간직한 간디의 결속력을 볼 때 일반 정치인들에게는 감히 이해조차 할 수 없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의 집념은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구해내고 말지 않은가?
세계의 위대한 위인들이 한 결 같이 신앙과 결부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느끼게 된다. 물론 종교 지도자들이야 당연하다고 보지만 정치인들에게까지 그 깊은 신앙심이 최후의 승자로 바꿔지게 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지는 거다.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중의 행동에서 어린 아이들의 이마에 입맞춤이거나 쓰다듬을 보면서 마치 노자(老子)께서 “(도道를 위해) 부드러움에 온전히 닫는 기운이 능히 영아(嬰兒)가 아닌가[專氣致柔 能嬰兒乎]!”하는 소리로 들리게 하고 있었다.
또는 “항상 덕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어린아이에 다시 되돌아간다[常德不離 復歸於嬰兒].”라고 하시는 말과도 같아서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 같아 좋았다.
물론 아이들은 천사라는 말은 동서를 막론하고 같이 인정하는 것 아닌가!
아이들을 각별히 지나치지 않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취를 보면서 ‘지금 저분은 많은 이들에게 부드러움에 돌아가라는 계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의 끈을 놓지 못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어찌 보면 의도적 행동으로 보일 것 같았지만 그 행동 하나하나가 부드럽게 넘어가고 있었다.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과정에서도 입맞춤은 여전했다. 몸이 뒤틀리거나 함부로 할 수 없는 장애인들에게 일일이 자신의 입으로 그들의 고통을 끌어안거나 쓰다듬는 것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대한민국 종교인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한 편 크나큰 부담이 될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에서 울어나지 못하는 행동이라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했을 것 아닌가? 그러나 그 누구도 그렇게 표현한 이들은 없다.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랑을 듬뿍 건네고 있었다는 거다. 심지어 장애인들의 노출까지 깊이 사려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표한 것에 감동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이 부담을 안아야 하지 않을까?
저버리지 말고 포용하라는 행동을 행동으로 옮기신 것 말이다.
세월호 유가족이 있는 곳이라면 스치거나 지나치지 않고 꼭 머물러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손을 잡았다는 것은 무슨 뜻이 포함하는 것인가! 정치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않고, 국민을 포용하는 마음이 깊지 못하면 결국 국민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국민의 아픔을 함께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지도자가 아니라 방관자 아닌가? 어찌 방관자가 지도자의 위치에 설 수 있겠는가?
그게 나를 버리지 않고서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본보기 아닌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이 우리 정치사에도 한 획을 긋는 일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하트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오른쪽)이 16일 충북 음성군 꽃동네 희망의 집을 방문해 장애아동들을 향해 머리
위로 팔을 올려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다. | AP연합뉴스
참고가 된 원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8172202035&code=960206&nv=stand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51555.html?_ns=c3
http://nnews.mk.co.kr/newsRead.php?year=2014&no=1103906&sc=30000001
http://www.hankookilbo.com/v/c9d3fb211ccb4531902f1dcfc947f45b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8172204015&code=960206&nv=stand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83&contents_id=1753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205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10255&cid=50765&categoryId=50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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