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야기

알리의 백인저항 운동과 트럼프

삼 보 2016. 6. 5. 05:32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942.1.17 ~ 2016.6.3.)는 “나비 같이 날아, 벌처럼 쏘겠다.”는 말을 남기고 영원을 달리했다.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체중의 헤비급 권투 챔피언을 했으니, 그가 스스로 말했던 것 같이 그 자신 권투에서는 "나는 왕"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흑인 복서로서 키 190.5 cm에 팔 길이 200 cm의 좋은 체격을 갖춘 덕에, 항상 강한 상대의 주먹을 피하면서 정신적으로 먼저 지치게 만들어 놓고, 육체까지 파괴되면, 자신의 영역을 잡아내고 말았다. 마치 백인과의 정신적인 투쟁과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베트남 전쟁당시 미국정부로부터 징집영장이 발부되자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는 말을 남기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했고, 인종차별 반대투쟁인 흑인 민권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기도 한 것이 그를 더 잊지 못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국가가 국가를 위해 부르는 징집에 거부행사를 한 것에 대해 수많은 이들로부터 항의와 증오 그리고 협박전화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의 근본적인 사고는 백인에 대한 항거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베트콩은 나를 깜둥이라고 무시하지 않소. 내가 왜 베트남 사람들을 죽여야 한단 말이오?” 라며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에 강한 의사를 나타낸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가 1960년 로마올림픽에 미국 대표선수로 나갈 때의 이름은, 1942년 1월 17일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을 때 본명인 캐시어스 마셀루스 클레이 주니어(Cassius Marcellus Clay, Jr.)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지혜로웠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흑인들 다수와 같이 떠벌이는 습관은 여전했던 것 같다. 상대를 말로 제압하겠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항상 백인들로부터 멸시를 당하는 인종차별에 항거하고 있었다.


 

    프로로 전향한 이후 1964년 2월 WBA(세계권투연맹)과 WBC(세계권투평의회)의 두 세계 헤비급 통합챔피언이던 소니 리스턴에게 통쾌한 승리를 거둔 클레이는 정신적인 스승 맬콤 엑스처럼 자신의 이름을 ‘캐시어스 엑스(X)’로 한 때 부르기도 했다. 미국인들이 노예에게 부여했던 성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였던 것이다. 당시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는 이슬람교의 분파이자 운동조직인 이슬람국가운동(Nation of Islam)에 참여했다. 그가 택하고 있던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있었다.


 

    당시 이슬람국가운동의 최고지도자인 엘리야 무하마드는 클레이에게 아주 큰 영예를 안겨주고 있었다. 바로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인 것이다. 잘 알다시피 그 이름은 이집트의 아버지라고 하던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이집트 총독으로 재임하였던(1805-1848), 무하마드 알리와 같은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엘리야 무하마드가 당시 이슬람국가운동의 실력자 맬콤 엑스에게도 부여하지 않은 이름을 그에게 주었으니, 클레이가 얼마나 큰 특혜를 받았는지 가히 짐작할 만한 일인 것이다.


    그 이름을 부여받고 클레이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이 ‘무하마드 알리’로 바뀌었음을 알리면서 “나는 알라를 믿고 평화를 믿습니다. 나는 백인 동네로 이사할 생각도 없고, 백인 여자와 혼인할 생각도 없습니다. 내가 택하는 길이 어떤 건지 알고 있고, 무엇이 진실인지도 압니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인종차별의 한을 풀기위해 복서로 전향해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프로로 전향하여 당시 세계 1인자를 단숨에 제압한 것도 마음이 풀리지 않아, 백인이 붙여줬던 흑인들 성인 클레이는 없다며 X로 한 것까지 다 말살하고, 백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슬람교의 무슬림이 돼 ‘무하마드 알리’로 새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징집명령에 불복한 이유로 타이틀을 빼앗겼고, 선수 자격도 정지를 받았으며, 법원에 기소돼, 법정에서 5년의 실형을 언도 받는다. 결국 파산되고 만다. 수입이 없어지고, 그 많던 이웃도 떠나고, 엘리야 무하마드는 종파의 칙령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단에서 제명시키고 만다. 그렇게 3년이 흘러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한다. 모든 제압에서 풀려나지만 얼어붙었던 몸은 쉽게 원상 복귀할 수 없었다. 난생처음 조 프레이저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그와 상대한 거대선수들은 리스턴을 비롯해서 플로이드 패터슨,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켄 노턴 등이 있었으며, 프로복싱 통산전적은 56승(37KO)5패의 막강 전적이 있다. 그는 199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와 BBC가 선정한 세기의 스포츠맨으로 선정되었으며, 복싱 역사상 위대한 챔피언 중 한 명으로 불리고 있다.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19차례나 방어했고, 은퇴 3년 만에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그래도 3년의 허송세월 외에 장장 20년의 빛나는 그의 화려한 선수생활은 40이 다돼서 끝을 내리고 있었으니 권투 계에서는 최장의 수명을 누린 선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길었던 선수생활로 인해 파킨슨병을 진단 받았고, 32년 투병 생활을 해오다 74세를 일기로 가족 곁에서 숨을 거뒀다. 파킨슨병과 긴 투병생활로 숨지기 직전에는 언어 능력까지 잃어 가족과 의사소통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남긴 공식 발언은 지난해 12월 미국 공화당의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무슬림에 대해 미국 방문 금지발언을 겨냥하여, “우리 이슬람 교도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이슬람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맞서 일어서야 한다.”는 성명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 트럼프는 2007년 ‘무하마드 알리 상’을 받은바 있다. 이 상은 미국의 권위있는 스포츠 잡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가 만든 것으로 사회에 공헌한 스포츠인들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트럼프는 알리의 죽음에 대해 “알리는 진정으로 위대하고 멋진 사나이”라며 “우리 모두가 그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트럼프와 알리(from Google)



  참고가 된 원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167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58093&cid=40942&categoryId=3348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08130&cid=43013&categoryId=43013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6/04/0200000000AKR20160604048100007.HTML?input=1195m#search

http://star.mbn.co.kr/view.php?no=402778&year=2016&refer=portal

http://news.naver.com/main/read.nhn?oid=055&sid1=104&aid=0000415872&mid=shm&cid=428291&mode=LSD&nh=20160604203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