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마음

임을 위한 행진곡 왜 제창이 힘드나?

삼 보 2016. 5. 17. 05:42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위키백과는 이 노래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1981년 소설가 황석영과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던 음악인 김종률 등 광주 지역 노래패 15명이 공동으로 만든 노래극(뮤지컬) 《넋풀이 -빛의 결혼식》에 삽입되었다. 이 노래극은 1980년 5월 27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중 전라남도청을 점거하다가 계엄군에게 사살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1979년 노동현장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하다가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 노래극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합창으로 쓰이기 위하여 지어졌다.


 

   곡은 김종률이 1981년 5월 광주에 있는 황석영의 자택에서 썼고, 가사는 시민사회 운동가 백기완이 YM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1980년 12월에 서대문구치소 옥중에서 지은 장편시 〈묏비나리 -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의 일부를 차용해 황석영이 붙였다.

 

   감시를 피해 황석영 자택에서 이동식 카세트 녹음기를 이용해 조악하게 녹음되었던 위 노래극은 1982년 2월 윤상원과 박기순의 유해를 광주 망월동 공동묘지(현 국립 5·18 민주 묘지)에 합장하면서 영혼결혼식을 거행할 때 처음 공개됐는데, 이 노래는 이후 카세트테이프 복사본, 악보 필사본 및 구전을 통해 노동운동 세력 사이에 이른바 '민중가요'로써 빠르게 유포되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적 대표곡으로서 자리 잡았다.


 

    원작인 백기완의 장편시 〈묏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중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 (전략)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후략)(위키백과에서)


    이 노래 가사의 원작자인 백기완(白基玩, 1932년 1월 24일 ~ )은 1998년 "나는 이 노래에 대한 소유권도 저작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미 이 땅에서 새 날을 기원하는 모든 민중의 소유가 됐기 때문이다."라며 저작권 불행사 입장을 밝힌 것으로 위키백과는 적고 있다.

 

    백기완은 황해남도 은율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시민사회운동가, 통일운동가로, 정치인이고 작가이다. 그는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이래 박정희 독재정권 이후의 반정부, 반 권력,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초등학교 이외의 정규교육과정은 거치지 않고, 독학의 학자이다. 실향민 출신으로 일찍이 통일문제에 눈을 떠, 1964년 굴욕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여하였고,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하며 백범 사상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민주화운동에도 뛰어들어, 1973년 박정희 독재정권의 유신헌법 개정 청원운동을 펼치다 긴급조치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백기완은 독재자 박정희가 그 시대 가장 껄끄럽게 생각하던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인 장준하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 파헤치려 했다. 1975년 9월 양일동, 김동길과 함께 장준하 장례식을 주관하고 추도사를 낭독한다.

 

   독재자 박정희의 10.26 사건 이후, 전두환 군부독재 당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발표에 반발하여 윤보선, 함석헌 등과 같이 1979년에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하여 체포되어, 계엄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선고 받아 복역한다. 복역 중 1980년 12월에 서대문구치소 옥중에서 〈묏비나리 -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장편시를 짓는다. 그리고 1981년에 3·1절 특사로 석방된다. 후일 대통령 후보에도 출마하가도 했지만, 무엇보다 김대중과 김영삼 두 거물들이 이견에 휩싸여 노태우에게 대권을 물려주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이이다.


 

    이 노래는 정치 독재자들에게는 가장 싫어하는 노래가 된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1980년부터 알려진 이 노래는 박정희 독재자와는 무관하지만, 그 딸인 박근혜에게도 아주 껄끄럽게 생각되는 것으로 안다. 단지 대권을 거머쥐기 위해 2012년 선거당시 호남지방을 방문하며 5·18민주묘지에도 방문하며 일종 미소를 띄워주기는 해도 그 가슴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1997년부터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국가 기념으로 된 이후, <임을 위한 행진곡>은 행사장 참여 모든 이들이 함께 입을 모아 제창하는 곡으로 선정이 됐지만, 2004년 당시 박근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알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사진이 공식적으로 흘러 다니며 구설에 휘말렸고, 2013년 사진도 그랬다.

    정치꾼들의 자존심이라서 더 그럴지 모른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2009년부터 5·18 행사를 기념하는 노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모두 입을 모아 제창하는 방식이 아니라, 합창단을 불러다놓고 2중창이든, 4중창이든 합창형식을 취하며, 따라 부를 사람은 따라 부르라고 보훈처를 통해 지시를 내렸다. 따라 부를 사람은 따라 부르라고 하지만, 광주에서는 제창 형식으로 잘하던 행사를 합창으로 이명박 정권이 바꾼 것에 은근히 화가 치미는 것 아닌가? 모든 이들이 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이념에 입을 함께 모아 기념을 해야 할 것을 한쪽에선 입을 꾹 다물고 있다는 것이 양에 차지 않는다는 것 아닌가?

    이 문제를 우리는 잘 풀어야 한다고 본다.


 

    장례식장에 참가한 조문객은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그 영혼을 위로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장례식에 참가한 이가 그 영혼을 위로하지 않으려면 그 장례식에 참가하지 말았어야 한다. 마치 그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으면 그 집으로부터 받을 영향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으니 의례적으로 참가했다면, 그 영혼을 같이 위로할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면을 쓰고 등장한 파렴치한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것인가?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고 했다. 상대의 슬픔을 덜어 주기위해 장례식장에 갔으면 그 장례식 절차에 맞게 의례를 치러야 온당한 인격이 된다고 본다. 그 장례식 의례에 맞추지 못 할 것 같으면 참가조차 않는 것이 차라리 마음이 편하지 않겠는가? 박근혜가 그런 행사에 참석한 것이다.


 

    더군다나 광주 5·18민주화운동의 상황을 비춰보면 참으로 비극적인 국가적 망신사건이었다. 국민의 감정을 휘어잡기 위해 광주를 하나의 본보기로 했다는 증거가 다분한 국가 치욕적이 사건이라고 본다. 권력을 잡기 위해, 김대중의 힘을 죽이기 위해, 아니 민주화 운동의 정치인들의 조직을 산산이 부수기 위해, 전두환 군부독재자의 광폭(狂暴)에 해당된 사건이었다. 수백의 인명을 앗아간 전쟁을 방불케 한 사건인데 그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된다. 그러나 지금도 그는 발포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며 잡아떼고 있는 중이다. 그 책임을 지려는 이는 없다. 그렇다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할 것인가? 모든 권력자들이 다 같이 책임을 지겠다고 나설 수는 없는 일인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치인들을 군부에서 짓밟으려고 했으니 그 당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을 비롯해서 그 일당들이 모조리 책임을 져야 옳지 않은가? 그런데 졸장부(拙丈夫)들은 하나같이 책임이 없다고 발뺌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정치인들이 있었기에 군부독재자들이 총을 들고 국민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모든 책임은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당시 정치인들을 뽑아 준 국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행위자를 벌하는 것으로 해야 피해자들 - 희생자들 - 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없었다. 수많은 희생자만 있지 가해자는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이 5·18의 결론이다. 말이 된다고 할 수 있는가?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의 정치였다. 파헤쳐야 되는데 파헤칠 사람이 없다. 고로 아깝게 희생된 그 영혼들만 애처로운 것이다. 그 해결을 누가 해야 할 것인가? 바로 국민이다. 그런데 5·18민주화운동 행사장에서 불러야 할 기념곡 하나도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말이 될 일인가? 참으로 애달프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희생자들을 생각한다면 피가 거꾸로 솟는 일이다. 박근혜는 5·13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 협치를 위한 자리에서 어정쩡하게 “국론분열을 일으키지 않는 좋은 방법을 찾도록 보훈처에 지시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나 듣는 쪽에서는 금년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으로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딱 맞는 말 같이 들린 것이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도 “제창을 허용하지 않기로 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아직 (행사까지) 이틀 남았으니 재고해 주길 바란다는 게 제 입장”이라고 말했다. 제창이든 합창이든 뭐가 문제냐고 떠들지만 잘 생각해야 한다. 1997년부터 2008년까지 제창으로 잘 해오던 것을 당시 한나라당의 이명박정권이 합창으로 바꾼 저의를 생각하면 그렇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을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있는 아량을 갖지 못한다면, 세상은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문제가 아주 큰 대형사건으로 번지게 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경상도와 전라도로 가르고, 보수와 진보로 가르며, 좌와 우로 갈라 지금도 서로를 향해 삿대질이나 하며 아무런 것도 아닌데 광주는 떠들고 있다며 몰아새우는 현실이다. 만일 남의 제사에 참여했으면 그 집 제사 방식에 따르는 것이 예의이다. 굳이 광주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야 하겠다면 부르게 해야 한다. 다 같이 불러달라고 하면 같이 불어줘야 슬픔이 덜어질 것 아닌가! 왜 그런 아량이 없는 것인가! 그대들이 바보인가? 대단하게 똑똑하니 국민들이 뽑아 준 인물들 아닌가? 똑똑하면 똑똑한 일을 해야 국민이 쉽게 따를 것 아닌가? 가슴을 펴고 힘껏 열기 바란다. 그게 대타협이고 협치가 되는 것이다.

    공자(孔子)께서는 “지도자가 세상 일처리에서 오로지 강제도 말고, 고집도 말고, 의에 더불어 따른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고 한 말씀을 되새겨 본다.



최정식 국가보훈처 홍보팀장이 16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브리핑실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기념곡 지정 및 제창 거부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뉴시스



  참고가 된 원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161714001&code=910100&nv=stand

https://ko.wikipedia.org/wiki/%EB%B0%B1%EA%B8%B0%EC%99%8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8569&cid=46626&categoryId=46626

http://news.naver.com/main/read.nhn?oid=005&sid1=100&aid=0000898820&mid=shm&cid=428288&mode=LSD&nh=20160516215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