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유래

가도사벽(家徒四壁)과 미인 탁문군

삼 보 2015. 3. 2. 08:19

         부제; 참된 미인(美人)은 정조(貞操)관념이 확실하다


   2006년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된 중국 드라마(drama) ‘봉구황(鳳求凰)’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봉구황’이란 ‘수컷 봉황새가 암컷 봉황을 찾는 다는 뜻’이다. 기원전 2세기경에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팔방미인이자 여류시인인 탁문군(卓文君)과 당대 제일의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 BC 179 ~ BC 117)에 대한 사랑이야기를 극화한 것이다.


   서한(西漢)의 쓰촨[四川]성 린충[臨卭]의 거상이자 대부호 탁왕손(卓王孫)에게는 아리따운 딸이 있었다. 이름 하여 본명(本名)은 문후(文後)라하며, 출생은 기원전 1세기경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사마상여와 동시대 인물이니 그저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시와 음률(音律)에 정통하여 문군(文君)이라는 이름으로 후일 알려지는 중국의 팔방미인이 있었다. 일찍이 16세에 출가하였으나 이듬해 남편이 죽어 나이어린과부가[新寡(신과)] 되고 만다. 친정으로 되돌아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지내는 딸의 심정을 달래기라도 하듯 탁왕손은 성대한 잔치를 연다.


   마치 양나라 효왕(孝王)의 문인으로 가서 있다가 효왕의 서거로 더 이상 양나라에 머무를 수 없었던 사마상여가 고향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에서 린충으로 와 왕길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다. 왕길과 사마상여가 탁왕손의 잔치에 초대되어 사마상여는 멋진 시를 읊는다. 거문고 가락에 따라 흘러나오는 시는 다름 아닌 ‘봉구황’이다.


                     봉구황(鳳求凰)


                                              司馬相如(사마상여)


鳳兮鳳兮歸故鄕 (봉혜봉혜귀고향) 봉이 고향에 돌아 왔구나

翶遊四海求其凰 (고유사해구기황) 황을 구하고자 천하를 날아 다녔구나

時未遇兮無所將 (시미우혜무소장) 때를 만나지 못해 여태 찾지 못했느냐

何悟今夕升斯堂 (하오금석승사당) 오늘밤 여기 올지를 어이 알았겠느냐


有艶淑女在閨房 (유염숙녀재규방) 아름다운 여인은 규방에 계시니

室邇人遐毒我腸 (실이인하독아장) 방은 가깝지만 사람은 멀어 애간장 태우고

何緣交頸爲鴛鴦 (하연교경위원앙) 어떤 인연이면 그대와 한 쌍 원앙이 되어

胡頡頏兮共翶翔 (호힐항혜공고상) 함께 저 높은 하늘을 날수 있을까


凰兮凰兮從我捿 (황혜황혜종아서) 황이여황이여 나를 따라 둥지를 틀어다오

得托孶尾永爲妃 (득탁자미영위비) 꼬리를 비비며 영원한 짝이 되리

交情通體心和諧 (교정통체심화해) 정 나누고 몸이 통하여 마음이 하나 되니

中夜相從知者誰 (중야상종지자수) 깊은 밤 서로 좋게 지낸들 뉘 아리오


雙翼俱起翻高飛 (쌍익구기번고비) 두 날개 활짝 펴고 높이 날아올라서

無感我思使於悲 (무감아사사어비) 더는 나를 슬프게 하지 마시오.


   사마상여는 녹기금(綠綺琴=거문고)을 아주 부드럽게 다루며 자신의 심중에 있던 회포와 함께 탁왕손의 17세의 딸(나이 어린과부)을 향해 마음에 두고 있던 연모의 정을 담아 연주했다.


   세상은 탁문군의 미색을 표현하기를

“文君姣好 眉色如望遠山 臉際常若蓮花 肌膚柔滑如芙蓉 十七而寡”

(문군교호 미색여망원산 검제상약연화 기부유활여부용 십칠이과)로,


“문군은 용모가 아름다웠다. 눈썹은 마치 먼 산을 바라보는 것 같았고, 뺨은 마치 연꽃과 같았으며, 살과 피부는 부드럽고 윤기가 도는 것이 부용과 같아 열일곱 나이의 과부”

 

   그녀는 중국미인(中國美人)의 조건인, 원산미(遠山眉 = 먼 산의 구릉을 연상하는 푸른 미인의 눈썹)에다, 연화협(蓮花頰=연꽃같이 붉은 빰)으로 부끄러움을 감추고 있었으며, 부용부(芙蓉膚=마치 흰 부용같이 부드러운 피부)의 피부를 소유했다고 해서 중국미인의 표본이라 한다.


   본시 심성이 강직하고 어떤 남성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던 여인이 단지 봉구황의 시와 함께 연주한 거문고 소리에 마음이 열리고 만다. 그녀 속에서 잠자고 있던 뛰어난 글재주와 탁월한 악기연주 실력이 상여의 연주와 시의 구절이 가슴을 열게 해주는 역할을 한 것이리라.


   밤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그녀도 사마상여의 의중을 알아챈다. 결국 둘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내고 첫눈에 반하고 만다. 둘은 수없는 날들을 지나온 연인들처럼 뜨거워지고 만다. 결국 그날 밤 상여의 집이 있는 성도로 둘은 도망치고 만다. 그러나 상여의 집이 얼마나 가난한지 그녀의 입에서 “가도사벽(家徒四壁=집이 단지 4벽 뿐)” 이라는 말로 그 상황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들은 백년가약을 맺고 탁문군의 집에서 타고온 수레를 팔아 술집을 차려 생계를 꾸리기로 결정한다.[文君夜亡奔相如 相如馬馳歸成都 家徒四壁立=문군야망분상여 상여마치귀성도 가도사벽립]

탁문군사마상여의 아내 탁문군

[네이버 지식백과] 권117. 사마상여열전 [卷一百一十七. 司馬相如列傳] (사기: 열전, 2013.5.1)




  * 지독하게 가난하다는 말로 ‘가도사벽’ 또는 ‘가도벽립(家徒壁立)’을 같이 쓰기도 한다. 한자풀이에서 家=집 가, 徒=단지, 다만 도, 四=넉 사, 壁=벽 벽, 立=설립으로 풀이하는데 徒가 여기서는 무리가 되지 않고, ‘단지’나 ‘다만’의 뜻이 함유되는 부사가 된다는 점이 특이 하다고 본다.



   사마상여는 자(字)는 장경(長卿)이며 쓰촨성의 청두에 처음 살면서 재물을 관가에 바쳐 시종관이 된다. 한의 초기 경제(景帝)는 문학에 큰 관심이 없어 사마상여가 뜻을 펼치지 못한다. 하지만 한나라와 이웃한 경제의 아우 양(梁)나라의 효왕(孝王)은 경제와 달리 문학을 좋아했기에 양나라에서 온 추양(鄒陽)·매승(枚乘)·엄기(嚴忌)와 같은 문인들을 따라 사마상여도 양나라로 넘어간다. 그러나 아쉽게도 효왕이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아 상여가 갈 곳을 잃고 다시 한나라로 넘어와서 갈등 속에서 지내며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가난 속에서 어여쁜 여인을 아내로 맞은 상여의 심정은 아마 지금 한국 젊은 남성들 가슴과 다를 것이 없을 것 같다.


   아리따운 새색시를 들여와 술을 빚어 연명을 하고 살 때 장인은 딸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다시 집으로 들어오게 하려 했으나 두 사람의 굳건한 결심은 변치 않았다. 아내가 술을 빚어 팔 때 상여는 같이 나가 설거지를 도와가며 오순도순 청춘을 불사른다. 둘은 시와 음악에 흥취해서 정답게 살아간다. 그들에게 하늘이 감동을 하셨는지 무제(武帝)가 등극한다. 무제는 문학을 즐기기로 유명하다. 하루는 사마상여가 지은 ‘자허부(子虛賦)’를 읽어 내려간다.



   자허(子虛)의 초(楚)나라 이야기와 오유(烏有)의 제(齊)나라 대화를 통해 각기 초(楚)나라와 제나라의 입장에서 자기 나라의 물산(物産)과 산천의 웅대함을 뽐내며 과시하고 있는데, 이는 각자의 나라의 명예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당시 지식인층인 사대부들의 자만심과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한 얘기들이다. 그러나 작품의 끝부분에 신분에 걸맞지 않는 지나친 사치는 옳지 못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통치계층의 사치를 풍자하고 있는 것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의 얘기들을 본 한 무제(漢 武帝)는 깊이 감동한다. 그리고 사마상여를 부른다. 사마상여는 시종관(侍從官)이 됐다. 그 뒤로 사마상여는 사부(辭賦)를 지어 바쳐, 동방삭(東方朔)과 매고(枚皐), 엄조(嚴助) 등과 함께 무제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수사(修辭)방식은 남달라 육조문학(六朝文學)에 끼친 영향이 지대한 것으로 나온다.



   남자는 배가 부르고 명예가 오르면 새로운 여자를 넘보게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마상여도 무릉(武陵)의 딸을 첩으로 삼겠다고 했다. 우리의 이조시대 같으면 찍소리도 할 수 없었겠지만 탁문군은 달랐다. 변심한 남성 옆에 자신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내용의 ‘백두음(白頭吟)’을 지어 남편에게 건네고 옷단장을 하고 나서려니 상여가 두 번 다시는 못된 생각을 하지 않겠노라며 다짐을 한다.


   본시 건강하다고 할 수 없었던 상여는 후일 병이 들어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남편이 병사하자 탁문군은 뇌문(誄文=조문)을 손수 짓는다.

   사마상여가 살아생전 겪어온 역사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 나열하여 공과 덕으로 문장을 세분하여 영전에 바친다.



   정조관념이 투철한 여인은 여성의 정조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진다. 남성도 마찬가지여야 된다는 것이다. 불결한 남성과 어찌 같이 한 이불을 덮고 살 수 있다는 것인가? 몸이 불결하다는 것은 영혼이 죄를 짓고 난 것인데 그 영혼과 같이 말을 섞는 그 자체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길어야 2년 징역형에 불과했던 간통죄마저 형법에서 지워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인륜의 역사(役事)를 더 온전히 할 수 있는 방침도 뚜렷하게 성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법 밖으로 성윤리가 퇴출된 상태다. ‘그저 알아서 해라!’는 답 같지도 않은 판단에 의해 사회가 흔들리고 있는 중이다. 여성이 불리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중국 고전에서도 남녀관계는 오직 선남선녀(善男善女)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세상은 자신의 영혼을 다해 바치면 틀림없이 영화가 온다는 거다.

 


   진실로 참신한 미녀는 정조관념이 투철하다. 어설픈 아름다움을 지닌 이들은 거짓이 포함될 수 있어 뒤집기를 자유자재로 한다는 것이다. 여인들은 거울 속에서 아름답다고 말 할 수 있다면 자신의 마음도 그러한지 스스로 확인해보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 관상으로 볼 때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완성판은 그 마음도 온전하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이 온전하면 자태도 바꾼다고 했다.



문군고리탁문군의 고향 마을에 남아 있는 유적

[네이버 지식백과] 권117. 사마상여열전 [卷一百一十七. 司馬相如列傳] (사기: 열전, 2013.5.1)




  참고가 된 원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6&aid=000002084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65255&cid=50801&categoryId=50806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7230&cid=40942&categoryId=3339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79411&cid=49637&categoryId=49637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69468&cid=41773&categoryId=41783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69735&cid=43792&categoryId=4379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80359&cid=41773&categoryId=50388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91862&cid=42219&categoryId=42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