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민주당 신임 대표 전력을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1988년 13대 국회를 통해 첫 등원되자마자 5공 청문회를 통해 통일민주당의 노무현, 이인제 당시 의원과 함께 송곳 질의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어 스타로 빛났던 이해찬(1952~ ) 7선 더불어민주당(민주당) 의원이 2018년 민주당 당대표로 선출됐다는 뉴스다.
청년 시절 그의 달변은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장관을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40대 국무총리까지 올랐었다.
그는 ‘선거의 귀재’라는 단어도 따라다니지만 그의 정치 인생은 순탄하지만 않았다고 보는 눈이 많다.
그는 철새 정치꾼 같이 당적을 많이 옮겨 다녔던 것 같지만 실상은 그가 속했던 당들이 당명을 수시로 바꿨기 때문이라고 나무위키는 적고 있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그가 속한 정당은 야당이었으니 그러했다고 말하기는 또 못마땅한 면도 없지 않다.
독재자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야권이 단합을 해야 하는데 정치꾼들은 서로 자신들의 의견만 옳다고 한 때문에 독재정권시대 야권 정치꾼들의 이권 다툼도 난장판이 될 때가 종종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추잡한 정치의 단면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어찌됐건 이해한 민주당 대표의 정치 歷程(역정)도 고난의 길을 걸어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의 역군이라는 점은 틀리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해찬 대표의 생애를 나무위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면(현 청양읍)에서 아버지 이인용과 어머니 박양순 슬하 5남 2녀 중 3남으로 출생. 참고로 이해찬의 조상은 덕흥대원군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시절 여타 정치인들과는 달리 이해찬은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부친인 이인용 씨가 청양면 면장 출신이기 때문. 이인용 씨는 광복 후에 32살의 나이로 청양면장을 맡아 4.19 혁명 때까지 면장을 지냈을 정도로 마을주민들에게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에 말기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야당 후보로 나서 면장에 당선 되었다고 하니, 지역 주민들의 신망이 투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찍이 서울로 상경해 덕수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를 입학한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를 다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하였고, 이듬해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로 재입학했다.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주로 운동권에서 활동했는데,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어 약 1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이 사건 후 무역회사를 다니기도 했고,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을 하기도 했으며, 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일하는 등 재야 인사로 지냈다. 1979년에는 돌배개출판사를 창업했다.
그러다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이 되었다가 해금 조치되면서 1980년 복학하여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참고로 재밌는 에피소드가, 이 때 이해찬과 유시민이 멱살잡이 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1학년생들의 병영집체훈련 응소 문제를 두고 운동권 내부에서도 총학생회측과 복학생협의회 사이에 의견이 달라 노선 싸움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집회에서 총학생회 간부였던 유시민이 사회를 봤는데 복학생협의회측에 발언권을 주지 않고 집회를 끝내려 하자 복학생협의회장이었던 이해찬이 달려들어 유시민의 멱살을 잡은 뒤 욕설을 했고 이어서 주먹을 날리려던 찰나에 사람들이 말려서 다행히 주먹다짐으로 번지진 않았다고 한다. 그 뒤로 둘은 화해를 했고 절친한 운동권 선후배 사이로 남게 되었으며, 훗날 잘 알려졌다시피 이해찬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 유시민을 보좌관으로 영입하게 된다.
그해 6월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이해찬은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수감 2년 6개월 만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재야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여 그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군사 독재 정권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삼아 감시했으나 굴하지 않고 반독재운동과 출판 활동 등에 종사했다. 1985년에 처음 서울대를 입학한 지 14년 만에 졸업하였다. 1987년 말에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을 지냈다.(나무위키)
이해찬 대표의 부친 때부터 대를 이어 야권 정치인으로 독재자들과 맞서는 정치활동을 한 집안으로 이어왔으나 이제는 여당 대표가 된 그의 소감은 남다르지 않을까싶다.
세상은 많이 달라졌고 대한민국 국민은 민주주의에 대해 成熟(성숙)해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보고 있는 중이다.
고무신 한 켤레 막걸리 한 잔에 반해 민주주의의 꽃인 귀중한 한 표를 독재자에게 던지던 우리의 관습에서 벗어난 그 대가를 이해찬 대표도 맛보고 있는 중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잘 알겠지만 20대 총선에서 이 대표는 무수속으로 세종시에서 당선됐다.
김종인 당시 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에 의해 이해찬 19대 세종시 지역구 국회의원은 당 공천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김종인(당시 전두환 노태우가 이끌던 민주정의당의 후보자)이 13대 총선의 관악을 지역에서 애송이 정치인이던 이해찬(당시 평화민주당)에게 패한 대가를 비겁하게 복수한 것은 아이었던가?
그러고 보면 민주당도 참으로 많은 역경을 딛고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비대위 대표를 김종인으로 세울 때 여론이 빗발쳤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비겁하게 상대를 꺾어야만 했던 한국 정치꾼들의 野史(야사)를 보면 추잡스러운 점도 적잖으니까!
그 때문에 정치인들의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를 외면하는 국민은 되지 말아야 국가는 발전하게 된다는 것을 잊어셔는 안 된다.
비겁하고 추잡하고 악랄하며 더러운 정치적 문제는 결국 역사에게 맡기면 된다.
이 대표는 과거 민주통합당 대표도 한 경력이 있으니 당 화합을 위해 잘 해나갈 것으로 기대를 해본다.
특히 21대 총선이 1년 후에 치러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민주당도 새롭게 변신해야 할 것도 많을 것이다.
물론 이 대표가 잘 처리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
기왕 최고의 자리에 서있으니 독재자들의 후예들이 더 이상 난무하지 않게 처음부터 깔끔하게 잘라내면서 日就月將(일취월장)의 민주당이 될 수 있게 이끌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성공을 빈다.
국민일보는
‘‘7전 전승’ ‘버럭 총리’ 민주당 신임 당 대표 이해찬은 누구?
이해찬 신임 당대표(66)는 더불어민주당의 최다선 현역 의원이자 국무총리까지 지낸 잔뼈 굵은 정치인이다.
1952년생인 이 대표는 충남 청양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일찍이 서울로 상경해 중학교,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그는 서울대 재학 시절인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그 과정에서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80년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 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돼 두 번 옥살이를 했다. 대학을 졸업하기까진 무려 14년이 걸렸다.
대학을 졸업한 뒤 이 대표는 1988년 13대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첫 발을 들였다. 서울 관악을 지역구에서 17대 국회의원까지 5번 연속 당선됐다.
그는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을 맡아 정권 교체에 공을 세웠다.
1988년 5공 청문회에서 통일민주당의 노무현, 이인제 의원과 함께 ‘송곳’ 질의로 스타정치인으로 발돋움 했으며, DJP 연합 당시 정책 공조 협상에서 성과를 거두면서 ‘선거 전략가’로도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 대표는 정부에서도 요직을 두루 거쳤다. 김대중정부에선 교육부 장관, 노무현정부에선 국무총리를 각각 역임했다.
특히 참여정부 시절엔 강한 권한을 가진 책임총리로 일했다. 이 대표는 총리 시절 국회 질의에서 야당과 공개 설전을 마다하지 않아 ‘버럭 총리’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19대 총선 때 국무총리 시절 세종시 건설을 직접 지휘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종특별자치시에 출마해 당선됐다.
민주통합당 첫 지도부였던 한명숙 지도부가 19대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2012년 당대표로 당선되기도 했지만, 18대 대선을 앞두고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당대표 대행을 맡기고 사퇴했다.
이 대표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지도부가 세종시를 전략공천 지역으로 선정하면서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하지만 20대 총선에서도 당선되면서 그는 7번의 선거에서 한 번도 지지 않고 전승한 국회의원이 됐다.
이 대표는 이후 같은 해 9월 민주당에 복당했으며, 당내에서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의장을 맡았다.
지난해 대선에선 문재인 대선후보 선대위원장으로, 6·13 지방선거에선 추 대표와 함께 수석공동선대위원장으로 활동했다.(국민일보; 2018-08-25 19:45)
원문 보기;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2630476&code=61111111&cp=nv
https://namu.wiki/w/%EC%9D%B4%ED%95%B4%EC%B0%AC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22&aid=0003299229
'적고 또 적다(積多)'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은혜가 누구인데 교육부장관 적합한가? (0) | 2018.08.31 |
---|---|
한국 우즈벡 4:3 힘겨운 승리와 군 면제 (0) | 2018.08.28 |
영세자영업자들과 꼼수 자한당의 김성태 (0) | 2018.08.23 |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한반도 위험 인물들 (0) | 2018.08.21 |
김경수 지사 영장기각은 당연한 처사 (0) | 2018.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