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News)와 생각

여성 독립유공자 광복절에 빛을 본다?

삼 보 2018. 8. 7. 00:56



과거 여성들의 간접 사회활동 참여를 인정하는 사회가 좋다

 

내 어머니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했을까?

남성들만의 힘으로 이만큼만의 대한민국의 성장을 인정하겠다는 생각을 지금껏 하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직접적으로 사회에 물어보고 싶은 문제의 사항이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아졌다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 인식하며 산다.

과거 사회를 질책하고자 하는 생각은 아니지만 여성의 사회참여를 두고 많은 남성들이 수긍하지 않았던 시절이 한반도에 널려 있었다는 것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었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깨어난 인물들은 여성 없이는 사회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남녀 구별 없이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던 인물들이 있었으니 대한민국 수준이 지금에 닿게 된 사연 아닐까싶다.

그래도 우리 어머니들은 남편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인양 남편의 성공을 위해 갖은 고생도 생활의 일부로 일삼았던 시절은 분명 있었고 사회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으며 남성들만의 성공으로 인정하고 남성우월주의 함정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시절은 분명 있었다.

그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 여성들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남성혐오주의를 내세우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숨어지고 있었지만 일깨워 여성들의 苦楚(고초)를 인정하려는 사회가 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 이해하며 自重(자중)하는 자세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을 우리가 긍정해드리지 못한다면 어찌 현실 사회에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잘 알다시피 도를 지나친 儒敎的(유교적사상에 흠모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성은 삼부종사 즉 三從(삼종)의 ()이라는 사상을 내세워 이조 500년 역사도 모자라 일제 강점기까지 그 여파는 이어지며 해방 이후에도 끊이지 않게 여성들을 苦役(고역)시키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로 인해 여성들은 남편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대리만족하는 사회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 대리만족을 위해 지금 어머니들 중에는 자신의 아이들에게서 느끼려고 갖은 애를 쓰며 치마 바람을 일으키는 여성으로 변하고 있는지 모를 일도 서울의 강남지역 등에서 벌어지고 있지는 않는지?

어찌됐건 과거 어머니들의 힘으로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는 것을 긍정하는 자손들이 우리라는 것을 알기에 이제부터라도 그 여성들의 숨은 공덕을 찾아 보답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과거 우리 어머니들 중에는 정확한 이름도 없이 아버지의 성씨만으로 이름을 대신하던 이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

삼부종사라는 怪異(괴이)한 사고를 만들어 낸 남성들이 문제였던 시대의 산물?

그 때문에 김 씨나 이 씨 박 씨 등으로만 이름으로 했던 여성들이 적지 않았었다.

그래도 많은 여성이 성과 이름을 정확히 갖춘 여성들도 있어 다행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그렇게 숨어 지내야만 했던 때문에 과거 독재정권들은 여성 비하의 사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남성우월에만 더욱 박차를 가하지 않았던가?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처럼 박정희 독재자는 물론 이승만과 전두환도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사고를 우리에게 일깨우는 일은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 定石(정석아닌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내이자 독립운동을 지원한 이은숙 여사(왼쪽). 항일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시아버지와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며 가족의 삶을 지탱했던 고 박애신 여사(오른쪽). 일조각·대한민국역사문화원 제공

 

이번 광복절 독립유공자’ 명단에 포함된 분 들 중에는 여성 유공자들이 많다.

시대의 변천이 아닌 사고의 변천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정부가 되고 있음이다.

‘‘우당의 아내’ 이은숙 여사건국훈장 받는다는 경향신문 제목에,

여성 독립운동가 고 이은숙 여사(18891979)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된다이 여사는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내다만주를 거점으로 한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그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광복절 독립유공자’ 명단에 포함

이 여사남편보다 56년 늦은 추서

 

이 여사는 오는 15일 열리는 73주년 광복절 및 정부 수립 70주년 경축행사에서 정부 포상을 받는 독립유공자 177명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6일 확인됐다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될 예정이라고 밝혔다포상자 중 여성 독립운동가는 26명이다무장독립운동에 헌신한 고 허은 여사(건국훈장 애족장)와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한 고 신창희 여사(건국포장등이 함께 포함됐다.

 

이 여사는 우당과 결혼한 지 2년 만인 1910년 12월 서간도로 이주했다해외에서 독립운동 터전을 일구겠다며 나선 길이다품에는 1년도 안된 딸이 안겨 있었다우당 등 6형제는 모든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옮겨 와 독립운동을 했다당시 처분한 돈이 약 40만원현재 화폐가치에 따라 환산하면 최소 650억원이다우당이 주도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청산리전투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주축이었다.

 

이 여사의 삶 자체가 독립운동의 기반이 됐다회고록 <서간도 시종기>에는 녹록지 않았던 만주의 삶이 녹아 있다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은 뒤 꾸려야 했던 가족의 삶은 곤궁했다. “잘 해야 일중식(하루 한 끼만 먹음)이나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절화(밥을 짓지 못함)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으니 생불여사(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삶)로다라고 이 여사는 회고했다이런 환경에서도 매일같이 방문하는 독립운동가들을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직접 국내로 들어와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기도 했다. “매일 빨래하고 만져서 주야로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이란 겨우 20원가량 되니그도 받으면 그 시로 부쳤다매달 한 번씩은 무슨 돈이라는 건 말 아니하고 보내 드렸는데우당장(이회영)께서는 무슨 돈인 줄도 모르시면서 받아 쓰시니우리 시누님하고 웃으며 지냈으나 이렇게 해서라도 보내 드리게 되는 것만 나로서는 다행일 뿐이다.” 우당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이 여사가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받기까지는 56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던 셈이다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이들의 손자다.

 

이 여사는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사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여성들 중 한 명이다총칼을 들지 않았더라도이들의 신산한 삶은 독립운동을 지탱하는 단단한 축이었다.

 

사단법인 대한민국역사문화원은 이번에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을 새로 발굴했다국내 항일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75명으로 가장 많다이어 학생운동 36, 3·1운동 35만주 방면 17중국 방면 13명 순이다.

 

의열단원 남편 지원한 박애신 등

항일운동사 이면에 가려진 이름들

역사문화원여성 202명 새로 발굴

여성 참여 없이는 지속 불가능했다

 

새로 발굴된 고 박애신 여사의 삶은 당시 여성의 기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그는 독립운동가인 의열단 김태규 선생의 아내로 고단한 삶을 살았다. 1919년 39일 결혼 직후부터 시련이었다. 3·1운동에 참여한 시아버지 김병농 목사가 바로 투옥됐고남편은 잠적했다시아버지의 1년 옥바라지가 끝날 즈음2의 3·1운동을 꾀했던 남편 역시 일제에 붙잡혀 다시 옥바라지가 시작됐다.

 

석방된 남편은 몇 달 뒤 독립운동을 위해 떠났다집 주변에는 늘 감시와 미행의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1922년 전갈이 왔다. “모월 모일 어느 역을 지나가게 되었소아이를 낳았다는데 얼굴을 보고 싶으니 기차역에 나와주면 좋겠소.” 젖먹이 아이를 업고 기차 차창을 통해 만난 것이 마지막이다생사 여부도 알 수 없었던 남편의 사망신고일은 1922년 31일이다박 여사는 1969년 생을 마감했다.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장은 박 여사와 같은 여성을 몹시 운 없는 여성으로 치부하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다시 그런 상황이 오면 절대 그런 삶을 살지 말아라그 긴 터널의 끝에는 어느 한 사람 네 수고와 희생을 기억해 주는 이 없는 허망함뿐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 했다.

 

 

1919년 310일 만세시위에 나섰던 광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대한민국역사문화원 제공

 

여학생이 주도한 만세시위도 기억해야 할 대상이다광주에선 1919년 310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교사와 학생 23명이 구속됐다. 10일 뒤엔 천안 광명여학교,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1일엔 서울 배화여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2의 3·1운동을 일으키고자 한 국내외 노력의 한 부분이었지만이 사건과 관련된 24명의 배화여학교 학생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졌다.

 

 

이 원장은 독립운동이 반 세기두 세대 또는 그 이상의 희생을 요구하는 긴 기간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참여와 지원 없이는 지속불가능했다고 말했다지난해 말까지 독립유공 포상자 14830명 중 여성은 296(2%)이다.(경향신문;2018-08-06 21:20)


 


시아버지와 남편의 옥바라지 남편과 가정의 뒷바라지 그게 없었다면 남성들만의 성공이 있었을까?

愛之重之(애지중지)하는 애틋한 여성의 마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이렇게 눈부시게 성장하여 나아가고 있을까?

한 푼이 아깝다며 스스로에게 쓰는 것을 절약하던 우리 어머니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세계무대에서 우뚝 설 수 있을까?

깊은 思惟(사유)의 속에서 눈을 감아야 하는 날이다.

 



원문 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856498.html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8062109015&code=960100